금강록 ()

한문학
작품
조선 중기에 정곤수(鄭崑壽)가 금강산을 기행하고 지은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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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정곤수(鄭崑壽)가 금강산을 기행하고 지은 기행문.
개설

『와유록(臥游錄)』(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회 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권8에 실려 있으며, 최철(崔喆)이 편역한 『동국산수기(東國山水記)』(덕문출판사, 1977)에도 실려 있다.

내용

일정은 1605년(선조 38) 8월 정묘일에 시작하여 3일 동안 유람한 것으로 짜여졌다. 첫날은 고성군백천교(百川橋)에서 출발하여 유점사 승려 10여 인의 안내로 이대래(李大來)·유해종(柳海宗)과 함께 구령(狗嶺)을 넘어 유점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낸다.

이튿날 남여를 타고 축수굴(蹴水窟)까지 이르자, 험한 바윗돌 때문에 남여를 버리고 나무뿌리를 잡고 절벽에 오른 뒤, 좁은 길을 찾아 천천히 걸어 은선대(銀仙臺)를 지나서 푸른 돌에 걸터앉아 12폭포와 그곳의 경치를 감상한다. 그리고 승려들이 전해 주는 청학(靑鶴)과 폭포에 얽힌 사연을 기록한다.

해가 저물자 다시 남여를 타고 비로봉에 이르러, 허봉(許篈)이 8월 16일 밤에 비로봉 정상에서 지은 시를 읊고 이허대(李許臺)에 이른다. 이어 마하연(摩訶衍)에서 그곳의 노승들과 문답하고, 만폭동에 가서 양사언(楊士彦)이 반석에 써놓은 ‘봉래풍악원화통천(蓬萊嵐嶽元化洞天: 봉래산과 풍악산은 하늘의 원기 그대로가 만들어 놓은 골짜기구나)’이라는 여덟 글자를 보고, 교룡(蛟龍)이 뛰어나오는 형상과 같다고 칭찬한다.

표훈사(表訓寺)에서 장안사를 향해 갈 무렵, 그곳 군수 이자교(李子喬)를 만나 밤늦도록 승방에서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사흘째 되는 날 남여로 표훈사로 돌아와 유해종과 함께 정양사(正陽寺)를 오르기 시작하여, 천일대(天逸臺)를 지나 헐성루에서 쉬면서 난간에 의지하여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에 눈길을 빼앗긴다. 이때 작자는 ‘저렇게 많은 봉우리들이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의심하면서 곁에 있는 승려에게 물어보며, 마침내 그곳의 경치가 아까워서 헐성루에서 이틀 동안 머물게 된다.

그때 “만폭동을 뛰어난 경승지라 하지만 헐성루 밑의 광경보다는 못하다.”고 한다. 곁에 있던 이계현(李啓賢)이 자기는 40년간이나 금강산을 드나든다고 하면서 “금강산을 보고자 할진대 곧 정양사를 가야 한다.”고 말하자, 작자는 그 말에 동의한다.

작자는 끝까지 승려들이 메고 다니는 남여를 이용했고, 곁에 산행을 안내하는 관리 이대래와 유해종이 있어 기행에 불편을 덜어 주었다.

의의와 평가

김창협(金昌協)의 「동유기(東游記)」, 이정구(李廷龜)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이경석(李景奭)의 「풍악록(楓嶽錄)」, 이명한(李明漢)의 「유풍악기(游楓嶽記)」 등과 함께 대표적인 금강산 기행록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기행문학의 한 고찰」(최철, 『인문과학』42, 연세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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