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청파(靑坡). 고려 때 신돈(辛旽)의 일당인 기현(奇顯)의 후손이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는데,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 3년 동안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또 제주목사로 나가서는 주민이 전복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이어서 내직으로 옮겨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년(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의 유약함을 기화로 해 권력을 농단하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하였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고 공론의 보장을 요구했으며,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 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찾았지만, 청맹(靑盲: 당달 봉사, 눈뜬 장님)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기건은 나올(羅兀: 너울이라고도 함)을 창안해 부녀자들의 외출시 머리 덮개로 이용하게 해서, 우리나라 풍속에서 너울을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뒤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