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김석형은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인 1939년 「 신라 최치원과 그 시대」(경성제대 『사회학보』)를 썼고, 학부졸업논문을 1941년에 「이조 초기 국역(國役) 편성의 기저」(『진단학보』14)란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양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5년 3월 검거되어 그해 6월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10월 서중석(徐重錫)의 보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대학동기생인 박시형(朴時亨)과 함께 월북, 평양에 신설된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8년 역사편찬위원회를 설치했을 때 부임위원이 되어 위원회의 운영을 맡고 위원회 간행 잡지인 『력사문제』에 고려∼ 조선과 관련된 6편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 뒤 1956년 1월 과학원(사회과학원의 전신) 역사연구소 소장이 되어 재임을 거쳐 1979년까지 북한에서 한국사 연구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북한 역사학계의 중진 · 원로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해방 후의 애국적 · 민족적인 의식을 한껏 고취하는 한편 일제 식민사학(植民史學)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을 가하는 가운데 한국사 체계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관련된 저서로는 『리조병제사』(1954), 『조선통사(상)』(1956) 중 고려후기 부분,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고려편)』(1960)이 있다.
1963년 김일성의 교시로 역사서술에서의 주체적 입장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전근대 시기의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김석형이었다. 이때 나온 결과물이 『조선통사(상)』(1977년판)와 『조선전사』(전33권)였다. 특히 『조선전사』는 북한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의 모든 역사연구자가 동원되어 집필된 것으로 1979년부터 3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김일성으로부터 인정받아 이후 학계의 요직을 거쳤다.
일찍이 과학원 원사(院士)로 뽑혔으며, 1958년 과학원 사회과학부문위원회 위원장, 1961년 5월 조평통 중앙위원, 1962년 10월 최고인민위원회 제3기 대위원, 1967년 11월 제4기 대위원, 1972년 12월 제5기 대의원, 1982년 2월 제7기 대의원, 1982년 2월 조평통 상무위원, 1986년 11월 제8기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8년 8월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 박사,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 원사 교수 박사가 되었으며, 1989년 5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남북회담대표로 남북 역사학자 회담을 제의하는 등 대남사업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1990년 4월 최고회의 제9기 대의원이 되었고,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 조선학학술대회 참가 시 누이동생 김금숙 등을 상봉하였다.
1991년 1월 조통연합 중앙위 위원, 1992년 4월 김일성 훈장 수상, 사회과학원 원장, 조평통 상무위원, 재북평화통일추진협의회 상무위원, 1993년 12월 최고인민위원회 상설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주관하였다. 1994년 7월 9일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1994년 12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2차 학술발표회’를 갖고 단군 · 고조선 역사의 전면 재서술을 주장하였다. 1995년 11월 15일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3차 학술발표회’ 개최하였다. 1996년 2월 8일 월북화학자 이승기(李升基)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71년 벽화가 그려져 있는 일본 나라[奈良]의 타카마츠스카[高松塚]무덤 발견을 계기로 하여 일본에 국제학술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북한측의 대표단장으로 참석한 것을 비롯해 그 뒤 여러 차례 도일해 학술교류활동을 꾀하기도 하였다.
1995년 11월 7일 김정일로부터 80회 ‘생일상’을 받았으며, 1996년 11월 26일 사망하였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1957)과 『초기 조일관계 연구』(1966) 등이 있다. 전자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사회구조를 봉건제라는 틀 속에서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계급구성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는 농노제만이 아니라 봉건적 예속민의 존재를 중시하면서 노예의 존재까지도 포섭하였다. 또한 국가의 역할을 중시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방법으로서는 문헌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고려 말기(14세기)와 조선 전기(15∼16세기)에 있어 노비와 양인(良人)의 존재형태를 확인한 다음, 이를 자료가 부족한 앞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내지 경제 형태를 밝혀보려고 했다.
북한학계는 1956년 10월부터 한국사에서의 고대와 중세의 경계를 획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열기 띤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김광진(金洸鎭) · 정찬영(鄭贊榮) 등과 함께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가 아닌 봉건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결국 이 책은 시대구분론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나온 직후 그는 「량반론」(『력사논문집』3, 1959)을 발표, 관인(官人) · 지주계층의 토지소유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한편 『초기 조일관계 연구』는 고대 일본 야마토[大和]정권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로 대표되는 일본학계의 그릇된 한 · 일관계 역사상(歷史像)을 ‘분쇄’할 목적에서 저술된 것으로 서기전 3세기경의 야요이[彌生]시대 개시 이래 서기 7세기 전반경까지의 1천년간에 걸친 고대 한 · 일관계사를 전반적으로 새롭게 다루었다.
그는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해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기타규슈[北九州]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널리 일본열도 전역에 걸쳐 삼국의 분국(分國)을 형성했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김석형 개인의 저작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최길성 · 박문원 · 림종상 등이 세부내용을 집필하고 서술의 방향과 기본골격은 김석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뒤에 그는 고고학 전문가인 조희승과의 공저로 『초기조일관계사』상 · 하 2권(1988)을 저술, 이 책의 내용을 일부 보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