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이후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역사 왜곡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들의 손길이 크게 미친 분야 가운데 하나가 고대 한일관계사이며, 그 결과물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그런데 임나일본부설을 하나의 학설로 보기도 하나, 그것은 학문적 탐구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역사상을 먼저 그려놓고 그것에 역사 기록을 짜맞춘 것이다. 이 설은 일제 관학자들이 조직적으로 연구하여 체계를 잡았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도 여전히 실려 있는, 어찌보면 지금도 생명력을 가진 제국주의의 잔재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임나(任那)'라는 어휘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나'라는 표현은 한 · 중 · 일 고대사서에서 종종 확인된다. 우리 측 역사기록 가운데는 3곳에서 확인된다. 즉, 만주벌판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서는 '임나가라(任那加羅)', 원래 창원에 있었던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文)에서는 '임나왕족(任那王族)', 『 삼국사기』 강수(强首)열전에서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중국 사서 가운데는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 『양서(梁書)』 , 『남사(南史)』, 『통전(通典)』 등에서 확인된다. 일본 사서 가운데는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 확인되는데, 『일본서기』의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
위와 같은 기록에서 '임나'는 주로 국명으로 쓰였다. 임나가 금관가야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가야 전체의 범칭으로 쓰였다. 임나가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근거로 학자들은 『일본서기』 숭신기(崇神紀)의 기록을 든다. 즉, 임나가 현재의 규슈[九州]에 해당하는 "축자국(筑紫國)으로부터 이천여 리 떨어져 있고 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에 해당하는 곳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하류 일대에 해당하며, 그곳에 도읍하였던 정치체인 금관가야가 곧 임나임을 알려 준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같은 책의 흠명기(欽明紀)에서는 대가야의 멸망을 서술하면서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멸망시켰다는 표현이 쓰였다. 금관가야는 그보다 앞선 532년에 멸망하였고, 대가야가 562년에 멸망하였으므로 여기서 임나는 곧 대가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기록은 임나라는 표현이 금관가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임나일본부란 이러한 의미의 '임나'에 '일본부'라는 표현이 덧붙여진 것이다. 주지하듯 '일본'이란 표현은 701년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4~6세기에 임나일본부라는 표현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에 따라 이 표현은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표현일 공산이 크다. 이 점은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하는 학자들의 주요 논거가 되고 있다.
'부(府)'에 대해 일본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출선기관(出先機關)’으로 해석해 왔다. 출선기관이란 출장소 내지는 출장기관이란 뜻으로 한반도 남부 지방에 설치하여 그것을 매개로 지배를 시행하던 통치기구라는 의미이다.
결국 임나일본부란 '임나에 설치된 일본의 관부'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이 표현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이 용어를 신뢰하는 경우 왜가 가야를 경영한 기관으로 보기도 하고, 조선의 왜관처럼 가야와 왜 사이의 교역 관련 업무를 수행하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 이 표현을 신뢰하지 않는 견해 가운데는 일본부라는 표현은 『일본서기』 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원래는 백제가 가야를 지배하던 기관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
임나일본부설은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으로도 불리는데, 1720년에 완성된 『대일본사(大日本史)』에서 최초의 전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신공황후(神功皇后) 때 삼한과 가라를 평정하여 임나일본부를 두고 통제하였다.”라는 기술이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 에도[江戸]시대 국학자들의 조선경영설을 거쳐 근대 일본이 천황 주권국가를 표방하던 20세기 초에 확립되었고, 1949년 말송보화(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서 완성을 보았다.
그는 왜의 대화조정(大和朝廷)이 신공황후 섭정 49년인 369년에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성립시켰고, 이후 그것을 매개로 약 200여 년간 한반도 남부 지방을 경영하였으며, 흠명천황(欽明天皇) 23년인 562년 신라에 멸망당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일 양국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현재는 입론의 근거를 상당 부분 잃었지만 변형된 형태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하여 북한학계에서 먼저 반론을 제기하였다. 1963년 김석형은 이른바 ‘일본열도 내 분국설(分國說)’을 제기하였다. 즉, 4~5세기의 일본 고분문화는 백제, 가야 등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고, 그 주체는 모두 한반도 계통의 소국인 분국이었으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기사는 모두 일본열도 내 한반도계 분국들 사이의 일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 학설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역으로 주장한 것이며, 사료 해석에는 큰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으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큰 자극제가 되었고, 임나일본부설의 기본적인 발상에 대하여 재검토를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어 남한학계에서는 천관우의 소위 ‘백제 군사령부설’이 제기되었다. 이 연구는 분국설과 함께 임나일본부설을 기저로부터 부정하는 것인데, 『일본서기』의 임나 관계 기록의 주체는 왜가 아니라 백제라는 주장이다.
즉, 서기 4세기 중엽경 백제의 근초고왕이 가야 제국을 정벌하여 백제권에 편입시킨 후 6세기 중엽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고 임나일본부란 백제가 가야에 파견한 군사령부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근래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볼 때 5~6세기의 가야 제국은 결코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았으며, 상당히 독자적인 성격이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문헌 사료를 통해 보더라도 대가야는 왜, 신라, 백제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 남제(南齊)로 사신(使臣)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을 정도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가야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견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1970~1980년대 이후 한일 양국 학계에서 보다 많은 연구 성과가 연이어 제시되었는데, 『일본서기』 흠명기의 기록에 대한 연구가 다수를 차지한다. 일본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왜의 군사침략과 지배기구’로 보는 연구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존재 시기를 줄이거나 범위를 좁혀 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임나일본부의 성립 배경에서 군사적 지배라는 측면을 배제하고 교역이나 외교라는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즉,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에는 통치나 군사적 역할과 관련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서기』에 종종 기록된 ‘부(府)’라는 용어는 그 원형이 미코토모치[御事持]인데, 미코토모치의 실체가 사신임을 확인해냄으로써 임나일본부란 임나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이라 인식하게 되었다.
국내학계에서도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에 동의하기도 하고 그와 달리 ‘안라왜신관설(安羅倭臣館說)’을 주장하기도 한다. 안라왜신관설은 임나일본부를 왜와 가야 사이의 교역과 관련지어 살펴본 견해이다.
즉, 임나일본부란 백제가 530년대 후반에 영향권 아래에 있던 안라에 친백제 왜인관료(倭人官僚)를 파견하여 설치한 기구로, 외형상으로는 왜국 사절 주재관의 명분을 지니나 실제로는 대왜 교역로를 확보하고 신라와의 마찰을 피하면서 가야 지역의 영향을 감시하는 한시적인 기구였다는 설이다.
외교사절설과 안라왜신관설은 모두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 다만, 임나일본부를 왜의 통치기구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대부분 외교사절로 보거나 외교사절의 주재관(駐在館)으로 보고 있다.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이래 전국 각지를 답사하고 그 결과를 담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조선경영설을 증명하기 위해 가야의 고지와 호남 지역 고분에 대한 약탈적 발굴조사를 벌였다.
대가야의 왕도인 고령, 금관가야의 왕도인 김해가 우선적 조사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그들이 고령에서 발굴한 무덤은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림왕릉(錦林王陵)이라 기록된 지산동(池山洞) 39호분이었다. 이 무덤은 고령 지산동고분군에 포함된 수백 기의 고총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내부에서는 왜인들이 임나를 경영하였다고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근래에 이르기까지 고령 지산동고분군에 대한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이 고분군이 대가야 지배층의 묘역임이 분명해졌다. 무덤의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보면 '대가야 양식'을 갖추었고 5세기 이후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또한, 신라와 백제 문화의 요소가 일부 확인되고 있어 대가야가 주변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였음이 밝혀졌다.
금관가야 왕릉을 찾으려는 노력은 일제강점기에 본격화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고자 금관가야 왕릉을 찾기로 하고 김해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기왕에 알려진 수로왕릉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였다.
오랜 공백을 거쳐 1980년대 후반에 다시 금관가야 왕릉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도 쉽지 않았으며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1990년에 이르러 김해 대성동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금관가야의 왕릉급 무덤을 찾아냈다.
발굴 결과 금관가야의 왕족 묘제는 거대한 목곽묘였다. 무덤 속에서 왜로부터 들여온 나무방패와 그것에 부착하였던 청동장식, 돌로 만든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지만 그것은 왜가 가야를 지배했던 증거로 볼 수는 없는 자료이다.
오히려 무덤 속에서는 금관가야 양식을 띠는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고, 크고 작은 철 소재와 더불어 여러 종류의 갑옷과 투구, 각종 마구류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서진(西晉), 삼연(三燕), 부여(夫餘), 동로마 등 원격지에서 제작된 물품이 출토됨에 따라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왜계 유물도 가야의 철을 구하러 오면서 왜인들이 가져온 선물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에 나주 반남면의 신촌리(新村里) 9호분을 발굴하였다. 대형 봉분 아래에는 옹관이 묻혀 있었고 그 안에서 금동관, 금동신발을 비롯해 함께 껴묻었던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는 "나주군에서 왜(倭) 시대의 유적을 실제 조사하였다. 장례 방식과 유물로 보아 이 고분에 묻힌 사람들은 왜인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이 지역 옹관묘가 일본 야요이[彌生]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토착적 묘제임을, 옹관묘에 묻힌 사람들은 영산강 수계의 풍부한 물산을 토대로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며 성장을 거듭하였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근래까지 해남, 광주, 함평, 고창 등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4기가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여러 기를 발굴한 결과, 대부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모두 영산강 유역 중심권에서 벗어난 채 흩어져 분포하며 출토 유물로 보더라도 나주 반남 고분군이나 복암리(伏岩里)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지역 중심세력에 비해 위계가 낮음이 분명해졌다. 일본학계에서 이 전방후원분이 임나일본부설의 흔적일 가능성을 고려하기도 하나 학술적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이다.
왜가 4~6세기 한반도 남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임나일본부라는 관부를 설치하였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학문적으로 보면 이미 존재 기반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이 조금씩 변형된 모습으로 재생산되고 있고, 일부이긴 하지만 교과서의 서술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의 우경화 경향에 발맞춘 역사 왜곡 문제와 더불어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왜계 문물 때문이다. 그렇지만 근래의 주장들 가운데 입론의 근거를 갖춘 주장은 거의 없다. 현 시점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 측 주장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가야사나 고대의 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를 정밀화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내 왜계 문물뿐만 아니라 긴끼[近畿]나 규슈[九州] 등 일본열도 내 한반도계 문물자료를 모아 해석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등 양국 자료를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임나일본부의 성격은 자연스럽게 해명될 것으로 전망된다.
향후 연구에서는 가야사를 중심에 놓고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가야 땅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논하면서 가야를 배제하고 왜나 백제를 중심에 두고 연구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 해명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론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근래 들어 가야사 관련 연구가 많아졌고, 가야 각지에서 진행된 발굴 조사의 성과가 속속 공개됨에 따라 가야의 발전 과정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가야는 삼한 소국 단계를 모태로 각자 발전하였는데 4세기까지는 금관가야가, 5~6세기에는 대가야가 각각 맹주적인 지위에 있었음이 해명되었다.
그리고 가야는 신라나 백제와는 달리 집권국가에는 미치지 못한 채 연맹체적 수준에서 완만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가 5세기 후반 이후의 대가야 전성기에는 연맹을 넘어 국가 단계로까지 발전하였음을 논하는 연구가 속속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가야사의 전개 과정이 제대로 밝혀진다면 당시의 국제 관계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강제로 전개되지 않았으며 다양한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졌음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고 자연히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이 드러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