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봉림산파의 중심사찰이다. 신라 말 효공왕대(897∼911)에 현욱(玄昱)이 창건하였으며, 현욱의 제자 심희(審希)와 심희의 제자 찬유(璨幽) 등이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떨쳤다.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전소되었다가 1900년대 초에 중창되었다. 현재 봉림사지 입구에 근래에 중창한 봉림사가 법맥을 잇고 있다. 봉림사 폐사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밀양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봉림사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 하였으나 승려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여주 이씨들은 선친이 별세하자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상여 3개를 만들어서 가로막는 승려들을 유인하였고, 그 틈에 시신이 들어 있는 상여를 운반하여 묘를 썼다고 한다.
그 뒤 절은 폐허화되었고 여주이씨의 가문도 역시 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약 200년 전의 일이라 전하며, 봉림사지 인근에는 중사골이라는 지명이 아직까지 전해오고 있다.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과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창원시 지귀동에 있는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창원 봉림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은 중 기단 위에 건립한 것으로 초층 옥신에 장방형의 문비(門扉)를 조각한 신라 말 · 고려 초의 작품이다. 또, 절터에서 1㎞ 떨어진 지점의 부처고개에는 마애불이 선각(線刻)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