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경상북도 안동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한 문인.
이칭
이승(以承)
도연(陶淵), 표은(瓢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8년(선조 31)
사망 연도
1669년(현종 10)
본관
의성(義城)
주요 저서
표은집(瓢隱集)
주요 작품
몽등관어대(夢登觀魚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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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시온은 조선 후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한 문인이다.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이를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겨 과거 및 사환을 모두 포기하고 피세은둔의 길을 택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안동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한 문인.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의성(義城). 의성김씨 천전파의 중흥조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아버지는 대박(大朴) 김철(金澈)이다. 종조할아버지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다. 어머니는 선삼김씨(善山金氏)로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딸이다. 부인은 풍산김씨(豐山金氏)로 김봉조(金奉祖)의 딸이다.

주요 활동

병자호란 당시 기병(起兵)하였지만 노모(老母)의 만류로 전장(戰場)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1637년(인조 19) 인조(仁祖)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이후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경학(經學)에 전념하였다. 1640년 모친상을 당했고, 3년상을 마친 후 와룡산(臥龍山) 아래 도연(陶淵)으로 이주하여 와룡초당(臥龍草堂)을 짓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51년(효종 2)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영해(寧海) 청기현(靑杞縣)으로 이주하였고, 1669년(현종 10) 7월 13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와 서신을 교환하며 종증조(從曾祖) 김성일의 문집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 간행에 관한 일을 논의하는 등 영남학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1708년(숙종 34) 김성탁(金聖鐸), 김태중(金台重), 권두경(權斗經) 등이 와룡산 도연에 모여 『표은유집(瓢隱遺集)』을 교정하였고, 1785년(정조 9) 유도원(柳道源), 김도행(金道行) 등이 송석(松石)에서 『표은집』의 편찬을 위한 수정 작업을 진행하였고, 1884년(고종 21) 『표은집』을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영조실록(英祖實錄)』
『표은집(瓢隱集)』

논문

김명균, 「표은 김시온 선생의 「몽등관어대(夢登觀魚臺)」시의 연역적 접근 -문인 김학배의 「표은선생김공행상(瓢隱先生金公行狀)」을 통하여」(『東洋禮學』 3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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