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선익(善益). 평양 출신.
아버지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에 이르렀는데,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후금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항상 ‘복수’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몸에 차고 다니면서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자손 500여 명을 모집하여 ‘복수군’이라 이름하고, 자기 아버지의 복수를 결심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자청하여 척후장이 되어, 안령전투(鞍嶺戰鬪: 오늘날 서대문 밖 무악재)에서 전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와 태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변방의 수비를 자원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사 남이흥(南以興)의 휘하에서 안주를 수비하다가 적병이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구원병이 없자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진흥군(晉興君)에 추봉되었으며, 고향에 정려(旌閭)되고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