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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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7년 2월 22일
사망 연도
1929년 1월 9일
출생지
황해도 수안
주요 저서
"나의 교역 생활"(1927)
주요 작품
"마음 우희 꽃피는 거시라", "전도인의 재덕"
주요 경력
평안북도 영변지방 감리사, 평양지방 감리사
관련 사건
평양기독교인박해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창식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인이다. 선교사들의 신실한 생활에 감동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1892년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전도인이 되었다. 그 후 홀과 함께 평양지방에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큰 고난을 겪었다. 1896년부터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아 서북 지방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였다. 한국인 최초 목사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전국을 누비며 각처에 48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인.
인적사항

김창식은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였으며, 자라서는 농사일을 하다가 21살에 세상을 알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1886년 29세에 박노덕과 결혼하면서 정착하였다.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훌륭한 인격과 신실한 생활에 감동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 뒤 올링거와 아펜젤러(H.G. Appenzeller)에게 성경과 교리를 배웠으며, 아펜젤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주요 활동

1892년 봄, 미국 주1 조선 선교회에서 전도인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1893년 올링거가 미국으로 돌아가자 미국 감리교 의료 선교사인 홀(W. J. Hall, 1891년 12월 내한)의 개인 비서 겸 주2가 되어 평양으로 갔다. 서문 밖의 어느 주3을 사들여 진료소를 겸한 예배당을 마련하였고, 1893년 8월에 홀과 함께 평양에 정식으로 주4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32년에 걸친 목회의 시작이었다.

한편 1894년 5월 주5였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서양 선교사를 돕던 장로교 한석진을 조사하고, 감리교 교인 8명을 평양 관아로 주6 사형에 처하겠다는 위협과 함께 주7를 강요하며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김창식은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미국과 영국 총영사가 조정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마침내 어명으로 관가에서 이틀 만에 풀려났다. 김창식 일행이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겪은 이 일을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라 부른다.

1894년 7월에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국내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다. 당시 교회당이나 선교사가 운영하던 병원은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피난을 가지 못한 이들의 은신처가 되었는데, 홀 선교사와 김창식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아서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해 12월 제임스 홀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김창식은 평양 선교를 도맡아 위기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교활동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평양제일교회(현, 남산현교회)였다.

1896년부터 신학회에 들어가 4년 과정의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았다. 1899년에는 삼화 골로 주8을 받아 평양 밖 지역까지 전도하였다. 이후 주9 사역자’로 서북 지방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는 ‘길바닥의 목사’, ‘민중 전도인’ 등으로 알려졌다. 15세에 집을 떠나 돌아다니며 얻은 경험과 지식은 목회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후 17년만인 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제17회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연회에서 한국인 최초 목사로서 김창식과 김기범은 집사 목사 주10를 받았다. 그 뒤 삼화교회 · 평양제일교회와 신계 · 연안 · 운산 · 덕천 · 양덕 · 맹산 · 영면 · 회천 · 원산 · 제천 지방을 다니며 순회 전도에 힘을 다 하였다. 전국을 누비며 각처에 48개 교회를 세웠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를 ‘한국의 사도 주11’이라고 부른다.

1918년은 경기도에서, 1919년은 안산 구역에서, 1920년에는 수원 서(西) 지방에서 각각 순행 목사로 일했다. 또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지방 주12로 임명되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평안북도 영변 지방 감리사로, 1912년에는 평양 지방 감리사로 목회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67세로 정년 은퇴하기까지 황해도 해주 지방 순행 목사로 활약했다. 은퇴 후 외아들인 김영진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제임스 홀 선교사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 조선에 와서 결핵 환자들을 위해 세운 해주 구세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1929년 1월 9일에 72세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편,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이덕주, 『새로 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개정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기타 자료

「나의 교역 생활」 (『승리의 생활』, 조선예수교서회, 1927)
홀 부인, 「고 목사 강창식 추억긔」 (『신학세계』, 1923.3.)
주석
주1

개신교의 한 파. 18세기 초 영국의 웨슬리가 제창하여, 교리보다 사랑의 실천에 중점을 두고, 감리사와 감독을 두어 교회를 다스리게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884년에 매클레이(Maclay, R. S.)가 선교하였다. 우리말샘

주2

장로교(長老敎)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교직. 또는 그 교직에 있는 사람. 우리말샘

주3

기생이 거처하며 술과 유흥을 제공하는 집. 우리말샘

주4

일정한 임무가 주어져 사람이 보내어지다. 우리말샘

주5

진보적인 것을 외면하고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려는 보수적인 무리. 우리말샘

주6

피고인 또는 죄인을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호송하다. 우리말샘

주7

믿던 종교를 배반함. 다른 종교로 바꾸거나 무종교인이 되는 일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8

일정한 임무를 주어 사람을 보냄. 우리말샘

주9

여행이나 공부를 하기 위하여 여러 곳으로 돌아다님. 우리말샘

주10

기도를 할 때 또는 성직 수여식이나 기타 교회의 예식에서, 주례자가 신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일. 우리말샘

주11

기독교 최초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 열렬한 유대교도로서, 기독교도를 박해하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바꾸어 전 생애를 전도에 힘쓰고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로마에서 순교하였으며, <로마서>ㆍ<고린도서>ㆍ<갈라디아서#GT#따위를 썼다. 우리말샘

주12

감리교 교직의 하나. 또는 그 직에 있는 사람. 지방 여러 교회를 감독ㆍ관리한다. 임기는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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