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식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인이다. 선교사들의 신실한 생활에 감동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1892년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전도인이 되었다. 그 후 홀과 함께 평양지방에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큰 고난을 겪었다. 1896년부터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아 서북 지방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였다. 한국인 최초 목사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전국을 누비며 각처에 48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
1892년 봄, 미국 주1 조선 선교회에서 전도인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1893년 올링거가 미국으로 돌아가자 미국 감리교 의료 선교사인 홀(W. J. Hall, 1891년 12월 내한)의 개인 비서 겸 주2가 되어 평양으로 갔다. 서문 밖의 어느 주3을 사들여 진료소를 겸한 예배당을 마련하였고, 1893년 8월에 홀과 함께 평양에 정식으로 주4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32년에 걸친 목회의 시작이었다.
한편 1894년 5월 주5였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서양 선교사를 돕던 장로교 한석진을 조사하고, 감리교 교인 8명을 평양 관아로 주6 사형에 처하겠다는 위협과 함께 주7를 강요하며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김창식은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미국과 영국 총영사가 조정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마침내 어명으로 관가에서 이틀 만에 풀려났다. 김창식 일행이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겪은 이 일을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라 부른다.
1894년 7월에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국내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다. 당시 교회당이나 선교사가 운영하던 병원은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피난을 가지 못한 이들의 은신처가 되었는데, 홀 선교사와 김창식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아서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해 12월 제임스 홀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김창식은 평양 선교를 도맡아 위기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교활동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평양제일교회(현, 남산현교회)였다.
1896년부터 신학회에 들어가 4년 과정의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았다. 1899년에는 삼화 골로 주8을 받아 평양 밖 지역까지 전도하였다. 이후 주9 사역자’로 서북 지방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는 ‘길바닥의 목사’, ‘민중 전도인’ 등으로 알려졌다. 15세에 집을 떠나 돌아다니며 얻은 경험과 지식은 목회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후 17년만인 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제17회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연회에서 한국인 최초 목사로서 김창식과 김기범은 집사 목사 주10를 받았다. 그 뒤 삼화교회 · 평양제일교회와 신계 · 연안 · 운산 · 덕천 · 양덕 · 맹산 · 영면 · 회천 · 원산 · 제천 지방을 다니며 순회 전도에 힘을 다 하였다. 전국을 누비며 각처에 48개 교회를 세웠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를 ‘한국의 사도 주11’이라고 부른다.
1918년은 경기도에서, 1919년은 안산 구역에서, 1920년에는 수원 서(西) 지방에서 각각 순행 목사로 일했다. 또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지방 주12로 임명되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평안북도 영변 지방 감리사로, 1912년에는 평양 지방 감리사로 목회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67세로 정년 은퇴하기까지 황해도 해주 지방 순행 목사로 활약했다. 은퇴 후 외아들인 김영진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제임스 홀 선교사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 조선에 와서 결핵 환자들을 위해 세운 해주 구세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1929년 1월 9일에 72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