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함(金涵: 1568∼1598)의 묘 출토의복은 1985년 4월 15일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서 김해김씨(金海金氏) 문중이 선산(先山)의 묘역(墓域)을 재정리·확장하기 위하여 이장(移葬)하던 중 출토된 일괄 17점의 유물이다. 김함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戰)에서 전사한 인물로, 시신을 찾지 못하자 나무로 시신의 형상을 만들어 염습하여 장례를 치룬 의리장(衣履葬)의 장속(葬俗)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목 부위에는 30과(顆)로 꿰어진 목걸이가 있었다고 하며 팔 아래로 삼 껍질로 만든 제웅이 5점 출토되었는데, 이는 군졸(軍卒)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물은 장옷[長衣] 3점, 저고리[赤古里] 2점, 바지[袴] 2점, 모자 1점, 누비무명버선 1쌍, 부들신 1쌍, 이불 1점, 목걸이 1점, 제웅 5점 등 17건이다. 김함의 유물은 1987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다.
김함의 묘에서 발굴된 3점의 포(袍)류는 모두 장옷으로 면주(綿紬) 누비장옷 1점, 화문단 누비장옷 1점, 무명 솜장옷 1점이 있다. 뒷길이는 116∼122cm, 품 75∼85cm, 화장 83∼95cm의 크기로 남녀 누구나 입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다. 깃은 들여 달린 목판깃에 소매는 끝동이 달린 일자형이며 겨드랑이 아래 작은 삼각무와 옆선에 큰 사다리꼴무가 부착되어 있다. 전형적인 16세기 양식의 장옷이다. 면주 누비장옷과 화문단 누비장옷은 겉감이 아청색이며 안에 솜을 두어 누빈 솜누비옷이다. 특히 겨드랑이 삼각무는 무늬 없는 공단과 운문단(雲紋緞)을 사용하여 겉감과 다르게 장식하였다. 나머지 무명솜장옷도 겉감이 아청색이며 두 점의 누비장옷보다 길이는 짧으나 품은 더 넓은 편이다.
저고리는 2점이 출토되었는데 1점은 무명이고 1점은 면주로 만들었다. 모두 아청색이 남아있으며 목판깃이 섶에서 반쯤 들여서 달려 있으며 화장에 비해 품이 상당히 넉넉하며 옆트임이 없고 겨드랑이 아래 옆선은 한쪽 무로 구성되었다. 무명저고리는 뒷길이 59cm, 화장 83cm, 뒷품 83cm이다. 소색 세주로 만든 동정이 달려 있다. 나머지 면주 솜저고리는 현재 깃, 동정 끝동이 탈락되어 없으며 솜이 밖으로 내보이는 형태로 남아 있다.
바지는 2점이 출토되었는데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당시 각각 ‘속곳’과 ‘내친고’로 등재되었다. 완형의 삼베 바지는 홑옷으로 길이가 83㎝, 바지 부리 68㎝이다. 바지 부리가 넓은 너른바지 형태로 정삼각형의 밑바대가 붙어있는 밑 막힌 바지이다. 옆선에 트임을 주었으며 90×5㎝의 고름이 달려 있다. 솜누비바지는 면(綿)으로 만들었으며 밑 트인 바지 부리 한쪽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소실되어 없는 상태이다.
그밖에 소모자, 무명 누비버선 1쌍, 부들신(명주실이나 무명실을 꼬아서 매듭지은 실로 엮은 신) 1쌍, 이불 1점, 구슬(珠) 1점, 제웅 5점 등이 있다. 모자는 소모자 또는 감투로 불리던 것으로 겉감은 아청색 무문단(無紋段)이며 안감은 소색 명주로 만들었다. 상단은 여섯 개의 삼각형 천을 이었으며 하단에는 일자로 대륜을 두른 육합모 형식이며 높이 19㎝, 지름 33㎝이다. 겉감과 안감 사이에는 소털이 2㎝ 정도의 두께로 넣어져 있다. 모자의 정수리에는 매듭단추가 달려 있다.
김함의 묘 출토의복은 출토복식 연구 초기에 발견된 자료로서, 매장주체의 신분이 밝혀진 16세기 선전관(宣傳官)의 복식이다. 조선시대 출토복식은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전기와 후기로 대별된다. 본 유물은 전기에 해당하며 크고 넓게 만들어진 복식의 형태로서 당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솜옷과 누비옷이 대부분이다. 계속된 후속 연구를 통해서 16세기 장옷과 속옷은 남녀 공용이며 보공용 복식에서 가족이나 친족의 의복이 포함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러한 측면은 본 출토의복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히 의리장의 장속은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포함한 일부 문집에서 보이고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