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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으로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가랑이가 나누어져 있는 형태의 하의(下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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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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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양쪽으로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가랑이가 나누어져 있는 형태의 하의(下衣).
내용

바지·고이 두 계통의 어휘가 있고, 한자어로는 고의(袴衣)·경의(脛衣)·각의(脚衣)로 표기된다. 고이는 신라의 ‘가반(柯半)’·‘가배(柯背)’에서 ‘가관(佳觀)→가교(佳膠)→가(佳)외→고이’로 변천되어 내려온 것으로, 여자의 고쟁이도 같은 어원으로 본다. 바지는 그 어원을 알 수는 없으나, 정인지(鄭麟趾)의 ‘바지(把持)’라는 표기로 미루어 현재의 명칭은 이미 조선 초기에 고정된 것 같다. 또한 조선시대 바지의 궁중용어로 ‘봉디’가 있고, 형태나 재료봉제법에 따라 그 명칭과 종류가 다양하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가 심한 우리나라는 어한과 내열에 알맞은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는 북방계 복식으로, 바지 착용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다. 몽고의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된 1세기의 흉노복의 바지가 지금의 우리 바지와 거의 같아, 그것으로 우리 고유 양식의 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사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궁고(窮袴)·적황고(赤黃袴)·장고(長袴)·대구고(大口袴)를 입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청금고(靑錦袴)와 곤(褌)을 입었으며, 신라에서는 가반과 갈고(褐袴)를 입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삼국시대의 바지에 대한 기록이 있어 능고(綾袴)·청금고·적고 등이 보인다. 특히 『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 부인복 가운데에 고(袴)가 기록되어 있어, 삼국의 남녀 모두가 바지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바지의 명칭은 그 모양이나 사용된 옷감, 색에 의하여 붙여졌다. 예를 들면, 가랑이가 넓은 것은 대구고·고대구·태구고, 길이가 긴 것은 장고, 옷감의 종류와 색에 따라 갈고·적황고·청금고·능고 등으로 된 것이다.

한편, 궁고는 가랑이가 넓은 바지에 대한 좁은 바지로 보는 설과, 밑이 막힌 바지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물 복식에서도 여러 가지 바지의 모양을 볼 수 있다. 그 모양은 지금의 한복바지와 거의 같으나, 가랑이의 폭은 고분이나 묘사된 인물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벽화에 나타난 바지의 모양은 크게 바지가랑이가 넓은 관고(寬袴)와 관고보다 가랑이가 좁은 세고(細袴), 그리고 가랑이가 짧은 곤이 있다. 바지의 폭은 계급의 상하에 따라 달라, 귀인은 관고를 입고 있으며 시중드는 사람은 세고를 입고 있다. 대체로 관고는 모두 바지부리를 묶었는데, 세고는 묶지 않은 채 부리 끝에 별색(別色)의 선(虜)을 대었다.

곤은 장수나 수문장·역사, 씨름하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여름용 잠방이와 같은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에 남녀 바지의 옷감에 대한 제한이 있어, 그 사용된 옷감을 보면 이때도 남녀 모두 바지를 겉옷으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바지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를 거의 볼 수 없다. 『고려도경』 장위조(仗衛條)에 궁고·백저궁고(白紵窮袴)가 보이고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쇠코잠방이[犢鼻褌]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는 『탁지정례(度支定例)』·『국혼정례(國婚定例)』·『상방정례(尙方定例)』·『가례도감의궤』·『궁중의대발기(宮中衣襨撥記)』에 바지와 이의(裏衣)·말군(襪裙)·봉디·너른바지·누비바지 등 다양한 기록이 보인다.

남자의 바지는 고대에서부터 그 기본형은 변함없이 명칭만 변화되면서, 바지·고의·잠방이라고 하여 겉옷과 속옷으로 입었다. 여자의 바지는 속옷화하여 치마 속에 입게 되었다. 여자 바지는 치마나 단속곳 속에 입는 속바지로 되어 모양이 남자 바지와 다르다.

조선 후기는 관고의 밑을 따로 떨어지게 만들어 여러 계층에서 모두 입었다. 밑이 따로 떨어진 두 가랑이를 서로 겹치게 하고 끈이 달린 띠허리를 달았으며, 바지부리는 좁고 배래는 곡선을 이루었다.

여자의 속바지로는 바지·너른바지·고쟁이·단속곳 등이 있었다. 겨울은 명주·삼팔·자미사·호박단 등으로 솜을 두어 만들었고, 봄·가을은 숙고사·진주사 등으로 겹바지를 만들었다.

여름은 옥양목이나 모시 등으로 홑고쟁이를 만들어 입었다. 다만, 말군이 있어 상류계급의 여자들이 가례승마(嘉禮乘馬) 때나 승교(乘轎) 때 착용하였다. 이는 여자들이 바지를 겉옷으로 입었던 풍습의 유래로 볼 수 있고, 이로써 귀천을 가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부녀 기마의 풍습이 사라짐에 따라 그 격이 낮아져 하층계급의 격식을 갖춘 승마복이 된 듯하다.

남자 바지의 모양은 폭이 여유 있게 넓고 마루폭·사폭·허리로 구성되어 있다. 몸의 허리에 띠를 매어 입고 바지부리를 발목에 대님으로 매어 입는다. 조선시대 때 출토된 것 중 누비바지를 볼 수 있는데,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모양의 변화가 거의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어린아이의 바지로 풍차바지가 있는데, 이것은 용변의 편리를 위하여 뒤를 길게 트고 양쪽에 밑을 달아 여며 입도록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바지는 고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옷의 기본 복식으로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남자 바지는 조선시대 사폭이 조금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정도이다.

계절에 따라 옷감과 색깔, 만드는 방법이 다를 뿐이며 기본형태와 입는 방법에는 변화가 없다. 여자의 바지는 속옷화하여 조선시대는 밑이 벌어지는 형태가 되었다가, 요즈음은 다시 원래의 막힌 형태로 돌아가고 있다.

참고문헌

『도지정례(度支定例)』
『국혼정례(國婚定例)』
『상방정례(尙房定例)』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궁중발기(宮中撥記)』
『한국복식사론』(이경자, 일지사, 1983)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벽화고분』(김원룡, 일지사, 1980)
집필자
박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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