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눌인(訥人).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무주 출신. 아버지는 김종원(金鍾元)이며, 어머니는 고씨(高氏)이다. 무주에서 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1922년 13세에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입, 1927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1928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31년 수료하였으며, 1934년 규슈대학[九州大學]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도시샤대학 재학 시절 정지용(鄭芝溶)과 친교를 맺었고, 졸업논문은 아놀드(Arnold, M.)에 관한 것이었다.
귀국 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明信中學校)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1934년 3월 최초의 번역문 「예술과 과학과 미」를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4월에 『조선일보』에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야」라는 최초의 평론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에 ‘구인회(九人會)’에 입회, 후기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시문학(詩文學)』 · 『시원(詩苑)』의 동인으로도 활약하였다. 민족항일기 말기에 사상관계로 1개월 동안 수감되었다가 다시 낙향하기도 하였으며, 1943년에 상경하여 무학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비평의 목적은 ‘재구성적 체험’에 있다고 파악하여, 인상주의 비평을 내세워 1930년대 평단에 새로운 비평 경향을 낳게 하였다. 특히, 카프(KAPF)의 공리주의적인 문학을 반대하고 비평과 문학의 독립성 · 순수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콜리지(Coleridge, S. T.) · 아놀드 · 페이터(Pater, W. H.) · 뵈브(Beuve, S.) · 프랑스(France, A.) · 지드(Gide, A.) 등의 다양한 이론을 도입하여 현대비평의 기초를 확립시킨 공이 컸다.
주요 평론으로 「문예시평(文藝時評)―나의 비평태도」(1934) · 「예술의 순수성」(1934) · 「비평태도에 대한 변석(辯釋)」(1936) · 「정지용론(鄭芝溶論)」(1938) · 「순수시비(純粹是非)」(1939) · 「문학의 성격과 시대」(1940) 등이 있다. 유작으로 『김환태전집』(1972년)이 있다.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