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은 일제강점기 『쇄기』, 『효경장구』, 『사례수용』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자는 이회, 호는 중재이다. 다른 이름은 김우림(金佑林)이다. 1896년(고종 33)에 출생하여 1978년 사망했다. 한주학파(寒洲學派) 곽종석의 문인이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을 만났다. 김창숙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1928년 산청군 신등면에서 강학을 시작해 약 50년 동안 1천여 명의 문도를 길러냈다. 김황은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1909년(순종 3)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의 황매산(黃梅山) 서쪽 만암(晩巖)이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더욱 문명을 떨치게 되었고,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1919년 스승의 명으로 곽윤(郭奫: 곽종석의 조카)과 함께 상경하여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였고, 여기서 김창숙(金昌淑)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거창에 내려와서 스승의 명을 받들어 진주 · 산청 · 삼가 등지의 유림을 순방하면서 장서의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뒤, 왜경에 발각되어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이 일어나자 옥고를 치렀다. 오래지 않아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스승의 상을 당했고, 이때 24세의 젊은 나이로 상례(喪禮)의 중책을 완수하였다.
1926년에는 여러 동문과 더불어 서울에서 『면우집(俛宇集)』을 간행하였다. 상해에 망명 중이던 김창숙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김황은 김창숙의 은신처로 몰래 연락하면서 『면우집』 간행소에서 유림조직을 이용하여 모금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김창숙이 가지고 간 거액의 자금이 뒤에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의거(東洋拓殖株式會社 投彈 義擧) 등 독립운동에 사용되었음이 알려져 제2차 유림단사건이 일어나자 9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28년 만암을 떠나 산청군 신등면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했는데, 약 50년 동안 1천여 명의 문도(門徒)를 길러냈다. 광복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이 방학기에 몰려들어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유림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 말 창씨령(創氏令)이 내려지자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끝내 보발(保髮: 머리를 기른 채로 보존함)하여 전통유림의 모습을 고수했으며, 자녀들도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압력은 물론이고, 일체의 비리와 무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학(道學)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를 널리 성심껏 후인들에게 전수하는 데 힘썼다. 또한 이를 현대의 신지식층에게까지 이어지게 하여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결시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구실을 하였다.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섬세하게 섭렵하여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근서천군전후(謹書天君傳後)」 · 「동유심학약도(東儒心學略圖)」 등에서는 심설(心說)을 중심으로 독특한 성리학계보도(性理學系譜圖)를 만들어 이황(李滉)-김우옹- 이진상(李震相)-곽종석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심즉리설의 학통을 지켰다. 그는 성리학적 논변에서 심즉리설의 개념을 분석하고 논증함으로써 논리적 치밀성을 바탕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사서삼경 등 역대 경학(經學)에 대한 『쇄기(瑣記)』 · 『효경장구(孝經章句)』, 예학(禮學)에 관한 『사례수용(四禮受用)』, 역사에 관한 『동사략(東史略)』 · 『역년도첩록(歷年圖捷錄)』 · 『독립제강(獨立提綱)』 · 『환영대조(寰瀛對照)』(연표), 시문집인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 그리고 『일기(日記)』 등이 있다.
그는 도학의 가치규범 대신 물리적 · 실리적 가치가 우위를 차지한 시대에 살면서, 20세기의 우리 사회가 겪은 사상사적 급류 속에서 심(心)이 공리(功利)에 미혹되어 심의 본체가 지닌 근원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리(義理)의 상실을 경고했다. 또한 도덕적 주체성을 자각시키고 정립하기 위해 이를 실천적으로 추구하여 도학의 정통성을 굳건히 지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978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많은 조객이 운집하여 유월장(踰月葬)으로 장사지냈다.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