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낙산사의 원통보전(圓通寶殿) 앞뜰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조선 세조(1455∼1468) 때 이루어진 낙산사 중창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의 중창은 왕실차원에서 각종 물자를 조달하였으며 1466년부터 시작되어 1468년까지 완성되었다.
이 탑은 1968년 12월 19일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 4월 5일 동해안 산불이 번지면서 낙산사를 덮친 화마로 이 탑도 손상을 입어 석탑 표면이 균열되는 등 많은 훼손을 당했다.
탑의 높이는 6.2m이며, 옥개석 귀퉁이에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는 것 이외에는 상륜부(相輪部)까지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탑의 구조는 평면이 방형(方形)으로서 단층의 기단석 위에 탑신부가 놓이고 그 위에 상륜부가 마련되어 있다.
기단부는 1석으로 된 방형의 지대석이 있어 그 윗면에 높고 큼직한 2단 받침을 마련하여 기단을 받게 하였다. 한 돌로 만든 방형의 하대석 윗면에는 24잎의 복판복련화문(複瓣覆蓮華紋)이 조각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1단의 낮은 받침을 내어 기단면석을 받고 있다.
면석은 방형 1석으로서 각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그 위에 갑석이 놓여 있다. 갑석은 위와 아래가 모두 평평한 1매 판석인데, 밑에는 얕은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고 윗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게 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층마다 1석씩인데, 각 층의 탑신 밑에는 방형의 두꺼운 굄돌 1매씩을 끼워놓은 점이 특이하다. 각 층 탑신에는 우주의 표시가 없고, 상층으로 올라가는 체감비율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옥개석은 그 아랫면에 층마다 3단씩의 각형 받침이 마련되어 있으며, 추녀는 매우 얇고 네 모퉁이의 전각은 반전(反轉)이 심한 편이다. 낙수면은 매우 평박(平薄)하고 각 모퉁이의 합각머리가 뚜렷하며, 특히 여기에도 전각부에 이르면서 반전을 보이고 있어서 추녀의 반전, 평박한 낙수면 등이 잘 어울려 경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옥개석 또한 체감비율이 낮아서 탑신부의 전체 형태가 높게 보이기도 한다. 각 옥개석 윗면의 탑신굄돌은 각형으로 1단씩을 내었는데, 이것은 그 위의 굄돌 아랫면의 받침부와 잘 맞도록 되어 있어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탑(造塔)양식의 일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상륜부는 칠층 옥개석 위에 각 층의 탑신굄돌과 똑같은 형태의 1석 굄대가 있고, 그 위에는 하면에 3단의 받침이 있는 노반(露盤)을 얹은 위에 청동제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를 중심으로 하여 상륜부재가 겹쳐 쌓여 있다.
이 상륜들은 모두 청동제인데, 노반 위에는 원형의 복발(覆鉢)이 있으며 그 위에 원형의 앙화(仰花)가 놓이고, 그 위로는 보륜(寶輪)이 원추형으로 6륜(六輪) 겹쳐졌고 보주(寶珠)가 그 위에 장식되었다.
노반 위의 청동제 상륜부는 그 형태가 곧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연상시키고 있어서 매우 주목된다. 또한 하대석 위쪽에 복련을 장식한 점이나 각층 탑신 아래에 괴임돌을 받친 점 등은 인근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신복사지 삼층석탑이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탑신부와 비교되고 있다.
조선 세조 때 낙산사의 중창과 함께 건립된 이 탑은 조선시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아 불교가 쇠퇴하고 그 조형 미술이 위축되었던 시기에 건립된 조선 전기의 탑으로 고려의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