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참봉, 감찰, 평택현감,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함경도 출신의 문신.
이칭
성원(聖源)
오룡재(五龍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1년(영조 7)
사망 연도
1798년(정조 22)
본관
의령(宜寧)
출생지
함경도 종성 부계(涪溪)
주요 저서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
주요 관직
현릉참봉|사헌부감찰|평택현감|공조좌랑
내용 요약

남명학은 조선 후기 참봉, 감찰, 평택현감,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함경도 출신의 문신이다. 한몽린의 문인으로 1759년(영조 35년) 29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768년(영조 44년) 집경당에서 열린 경연에 참석하여 왕의 특은으로 현릉참봉에 임명되면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스승과 함께 함경도의 유학을 진작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의
조선 후기 참봉, 감찰, 평택현감,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함경도 출신의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원(聖源), 호는 오룡재(五龍齋)이다. 영남(嶺南)에 살던 선조(先祖)가 함경도 6진으로 유배된 것을 계기로 대대로 종성(鍾城)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남운기(南雲起), 아버지 남이혁(南爾赫),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1731년(영조 7)에 함경도 종성 부계(涪溪)에서 태어났다.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두여(韓汝斗)의 딸이다.

주요 활동

두 형과 함께 한몽린(韓夢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59년(영조 35년) 29세의 나이로 주1 생원시 2등으로 입격하였다. 1768년(영조 44년) 집경당(集慶堂)에서 열린 경연에 참석하여 영조의 특은(特恩)으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옹원직장과 내자시주부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문의현감(文義縣監)과 평택현감(平澤縣監) 등을 역임하였고, 1795년(정조 19) 공조좌랑을 지내고, 1797년에는 종4품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에 올랐다.

효성이 지극하여 41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3년간 주2를 하였는데, 이때 고기 및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고 주3만 하였다고 전한다. 1798년 68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교유

유한준(兪漢雋)윤행임(尹行恁)한몽필(韓夢弼)송환기(宋煥箕)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고, 함경도에 유학을 진작하는 데 기여하였다. 시문집으로 1책의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1817년(순조 17) 후학 양성에 크게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종성서원(鍾城書院) 내 희성사(希聖祠)에 한몽린 · 한세양(韓世襄) · 한여두(韓汝斗)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금릉집(金陵集)』
『봉암집(鳳巖集)』
『숭정3기묘식년사마방목(崇禎三己卯式年司馬榜目)』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실록(英祖實錄)』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
『정조실록(正祖實錄)』
『종성지(鍾城誌)』
주석
주1

식년마다 보이던 식년과의 시험.    우리말샘

주2

상주가 무덤을 지키는 일.

주3

고기반찬이 없는 밥.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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