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의 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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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 · 강순(康純) 등이 역모의 죄로 처형당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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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 · 강순(康純) 등이 역모의 죄로 처형당한 사건.
내용

남이는 태종의 외손으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아 1457년(세조 3)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무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서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데 세운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27세에 공조판서가 되고, 그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강희맹(姜希孟)·한계희(韓繼禧) 등 훈구대신들이 그가 병조판서의 직임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예종은 이를 받아들여 병조판서에서 해임,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다.

이러한 때 혜성이 나타나자 그는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이 사실을 예종에게 알리면서,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 고변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문초를 받게 되었다.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그가 김국광(金國光)·노사신(盧思愼) 등을 비방하면서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것을 기다려 거사하겠다고 말한 사실이 있음을 진술하였다.

남이의 측근자인 순장(巡將) 민서(閔敍)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야인들에 대한 방어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변(天變)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 것이 두렵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간신은 한명회(韓明澮)라 했다고 진술하였다.

한편 남이의 역모 혐의가 더욱 불리하게 된 것은 당시 함께 겸사복(兼司僕)으로 있던 여진 출신의 무장인 문효량(文孝良)의 진술이었다. 그는 남이의 침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천변의 사실을 들어 간신들이 난을 모의할 징조이니 자신과 함께 이들을 몰아내어 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제의를 했다고 진술하였다.

남이의 이런 뜻에 강순도 뜻을 같이하고 있으며, 임금이 산릉(山陵)에 가는 도중에 두목격인 한명회 등을 제거하려 했다고 하였다. 그런 다음 영순군(永順君)과 구성군(龜城君)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 했다고 진술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이는 강순과 함께 모든 것을 인정하는 자백을 하였다. 이로써 선왕(先王 : 世祖) 때부터 남이의 사람됨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예종은 그를 제거하는 데 이 옥을 이용한 것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해 강순·조경치(曺敬治)·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랑·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또 남이의 장인인 김개(金漑)의 관직을 빼앗고 그의 어머니를 위시해 그들의 심복인 조영달(趙穎達)·이지정(李之楨)·조숙(趙淑) 등 25인과 장용대(狀勇隊)의 맹불생(孟佛生)·진소근지(陳小斤知)·이산(李山) 등을 죽였다.

윤말손(尹末孫)·정숭로(鄭崇魯) 등은 공신녹권을 몰수하는 동시에 이들을 종으로 삼고 최연원(崔演元)은 변방에 충군(充軍)되었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병조판서의 자리는 그가 다른 어떤 직분보다도 아끼고 원하던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예종의 즉위와 함께 반대자들의 건의로 직을 빼앗기자 이에 대한 울분이 컸을 것이다. 그리하여 역모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이가 무인이고, 거사하기 전에 가까이 지낸 사람들이 강순을 비롯해 거의 모두가 무인이었다. 이 점으로 볼 때 남이 등의 역모는 세조 때 배출한 무인들이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김국광·노사신·한계희 등 훈구대신의 동향에 시기와 의구심을 품고 이들을 제거하려는 무인반란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임진왜란 전까지는 남이를 난신(亂臣)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극으로 표현한 대표적 기록으로는 『국조기사(國朝記事)』와 『동각잡기(東閣雜記)』의 두 문헌을 인용한 『연려실기술』이다.

이를 요약하면 예종은 선왕 때부터 남이를 미워했는데, 즉위하자마자 곧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직하였다. 때마침 혜성이 나타나니 하루는 남이가 숙직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혜성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불러들이는 형상이다.”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의 재능·명성·벼슬이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한 유자광이 엿듣고는 남이의 말에 거짓을 보태어 남이가 반역을 꾀한다고 몰래 왕에게 아뢰어 마침내 옥사가 일어났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이후 일부 야사에 남이가 비극적 영웅으로 묘사된 것은 유자광에 대한 후대인들의 인식으로 인한 것이었다.

즉 조선 중기의 무오·갑자 사화의 책임을 후세인들이 유자광에게 돌려 그를 극악무도한 간신으로 인식한 것과 관련되어 남이의 옥도 그가 날조했으리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때에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이 그의 억울함을 상소한 것이 받아들여져서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
『예종실록』
『순조실록』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선원계보(璿源系譜)』
『연려실기술』
『조선초기정치지배세력연구』(정두희, 일조각, 1983)
「남이의 옥 재고」(최영호, 『역사와 인간의 대응』, 1984)
집필자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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