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통영시, 서쪽은 전라남도의 광양시 · 여수시, 남쪽은 남해, 북쪽은 하동군 · 사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48′∼128°51′, 북위 34°04′∼34°56′에 위치한다. 면적은 357.52㎢이고, 인구는 4만 586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222개 행정리(79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에 있다.
남해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며, 남북 약30㎞, 동서 약 26㎞이다. 망운산(786m) · 금산(681m) · 원산(627m)등 다소 높은 산지는 많은 반면 하천은 모두 짧고 평야도 매우 협소한 편이다. 해안선 연장은 302㎞이며 육지부인 하동군 금남면과 연결되는 육계도(陸繫島)에 해당한다.
지세는 소백산맥의 말단부가 거창 · 산청 · 함양 · 하동을 거쳐 내려와 바다에 함몰했다가 다시 본 섬에서 솟아올라 일부의 산악지역을 형성하고 있어서 기복은 낮지만 적지 않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평야지대는 전체면적의 약 25%를 점유하며, 대부분이 해안이나 산곡을 따라 형성된 분지에 분포한다. 군 관내에는 또한 68개의 섬이 있는데, 3개의 유인도(큰섬 · 범섬 · 노도)와 6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선은 대단히 굴곡이 심하며, 군 동쪽으로 강진 · 동대 · 미조 · 앵강 등의 만과 작은 포구들이 형성되어 있다.
서반부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녹두산(鹿頭山, 451m) · 사학산(四鶴山, 340m) · 삼봉산(三峰山, 422m) · 망운산(望雲山, 786m) · 관대봉(冠帶峰, 469m) · 천황산(天皇山, 395m) · 망기산(望崎山, 340m) · 응봉산(鷹峰山, 473m) 등이 있다. 또한, 동반부의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산성산(山城山, 371m) · 금음산(金音山, 481m) · 대국산(大局山, 375m) · 괴음산(槐陰山, 604m) · 송등산(松登山, 617m) · 노구뒷산(501m) · 금산(錦山, 701m) 등이 펼쳐져 있다. 이 군에 부속된 전국 제9위의 큰 섬 창선도(昌善島)에도 연대산(蓮臺山, 339m) · 동금산(東錦山, 358m) · 대방산(臺芳山, 468m) · 망치산(268m) 등이 있다.
이들 산악에서 발원한 입현천(笠峴川) · 동산천(東山川) · 초음천(草陰川) · 무림천(茂林川) · 다천천(茶川川) · 화천천(花川川) 등 15개의 하천들이 산지를 개석하여 곳곳에 작은 분지와 평지를 형성하고 각 방향으로 흐른다.
기후는 동한난류의 영향을 받아 온화한 해양성기후이며, 연평균기온 14.6℃, 1월평균기온 3.1℃, 8월평균기온 26.6℃이다. 연강수량은 1,780㎜로 우리나라 3대 다우지역에 속하고 강수의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된다. 평균습도는 66%이다.(2007년 현재)
지질구조는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지층이 대부분이며, 불국사화강암층이 지배적이다. 토양은 대부분 표층이 얕은 산지 암설토이나 해안지역에는 충적토가 분포한다. 식생으로는 비자나무 · 편자꽃 · 유자나무 · 난음비자림 등이 자생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이동면 다정리, 남해읍 남변리 · 평현리 · 심천리를 비롯해 군내 각지의 해안평야와 창선도에까지 밀도 높게 분포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섬이 내륙지방 못지않게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나 690년(신문왕 10)에 신라가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남해군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현(領縣)으로 설치했던 난포현(蘭浦縣)은 본래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 혹은 西平)으로 모두 이때 개칭한 것이다.
1018년(현종 9) 남해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영현인 난포 · 평산 양현은 왜구의 침범이 심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다. 남해현도 1358년(공민왕 7) 진주목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일명 鐥川 :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에 피란하였다. 창선도는 고려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라고 했다가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목의 영현으로 삼았다. 충선왕 때 흥선현(興宣縣)으로 개칭했으나 왜구 때문에 역시 살기는 힘들었다. 1269년(원종 10) 일본이 변경을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창선도에 수장했던 국사(國史)를 진도로 옮겼다. 고려 말 왜구의 침범이 날로 심해지자 1384년(우왕 10)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정지(鄭地)가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404년(태종 4) 왜구 때문에 진주 땅으로 피란한 지 46년 만에 남해현을 복구하였다. 이때 구라량(仇羅梁 : 지금의 사천) 만호 임덕수(任德秀)가 현령을 겸임하여 남해읍성을 축성하였다. 1414년 하동현과 합쳐져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하동과 분리되면서 진주목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편입,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 2년 뒤에는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하고 현령을 두었다. 1419년(세종 1) 곤명현(昆明縣)과 합쳐져 곤남군(昆南郡)이 되었다가 1437년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구수는 61호 271명이었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남해현의 민호가 738호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불과 15년 동안에 남해가 급속도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흥선도는 진주목 소속의 목장으로서 말 737두를 방목하고 있었다. 세조 때의 진관체제 성립에 따라 남해현은 진주진관 휘하에 들어갔으며, 현령이 절제도위를 겸임하였다. 수군은 제포진관(齊浦鎭管) 휘하의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가 통제하였다.
1486년(성종 17)에는 미조항(彌助項)에 수군첨사진을 설치했다. 그러나 왜구 때문에 한때 폐쇄했다가 1522년(중종 17)에 복구하였다. 이 무렵 기묘사화로 김구(金絿)가 남해도에 유배되었으며, 이때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막바지에 노량 앞바다에서 대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李舜臣)은 왜군의 퇴로를 가로막아 병선 400척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나, 관음포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633년(인조 11) 고을 사람들이 초사를 세워 제사를 모시다가, 1658년(효종 9) 통제사 정익(鄭榏)의 명으로 사당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사당은 1663년(현종 4)통영 충렬사와 같이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었다. 근년에 남해군민들의 정성으로 충렬사 · 관음포 등 충무공의 유적이 정비, 정화되었다.
임진왜란 후 흥선도는 창선도라는 옛 이름을 되찾고, 진주목 소속의 말문리(末文里 : 지금의 사천)에 합쳐졌다. 1759년(영조 35) 남해현의 호구수는 4,491호 2만 1,737명이었다. 1863년(철종 14)에는 진주민란에 호응해 농민 수천 명이 민란을 일으켜서 관아와 창고를 파괴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남해군으로 개편하였다. 1905년에는 진주목에 속해 있던 창선도가 남해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06년 창선도를 창선면으로 승격하여 남해군에 편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이예모(李禮模)의 주도하에 3월 3일 남해시장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1964년 1월 20일 삼동면 미조출장소와 서면 중현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68년 한려수도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0년 4월 1일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이동면 상주리의 갈도(葛島)가 통영군 욕지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남해고속도로와 남해대교가 완공, 개통되었다. 이로써 남해군은 완전히 육지와 연결되어, 본래의 농 · 수산업 이외에 관광지로도 각광받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 남해면은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에는 창선교가 개통되어 남해도와 창선도가 연결되었다. 1983년 삼동면 난음리가 이동면에, 서면 연죽리 일부가 남해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일에는 상주 · 미조 출장소가 각각 면으로 승격하였다. 1988년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상주면 상주리 일부가 미조면 송정리로 편입되었다.
불교 유산으로는 호구산(虎丘山) 용문사(龍門寺), 망운산 화방사(花芳寺), 금산 보리암(菩提庵) 등의 사찰이 있다. 그 중 이동면 용소리에 있는 용문사에는 대웅전(보물, 2014년 지정) · 남해 용문사 석조보살좌상 · 천왕각 · 명부전 등이 있다. 또한 고현면 대곡리에는 화방사 채진루, 이동면 상주리에 보리암삼층석탑, 다정리 삼층석탑, 남면 당항리의 남해 신흥사지 삼층석탑, 삼동면의 봉화리삼층석탑 등의 유산이 있다. 남해 용문사 석조보살좌상은 1974년 12월, 보리암삼층석탑은 1974년 2월, 다정리 삼층석탑은 1974년 2월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용문사 천왕각과 명부전, 화방사 채진루는 1985년, 남해 신흥사지 삼층석탑은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유교 유적 · 유물로는 남해읍 북변리의 남해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를 비롯해 운곡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 유희경 촌은집 목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 남면향약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등이 있다.
선사 유적으로는 이동면의 남해다정리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1983년 지정)를 비롯해 남해읍 평현리 · 심천리, 남면 상가리 · 평산리 · 당항리, 창선면 당항리, 고현면 대곡리 등지에 고인돌이 남아 있다. 남해읍 남변리 · 평현리 · 심천리, 미조면 미조리, 창선면 서대리에서는 민무늬토기 · 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편, 고현면 도마리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가 발견되었으며, 김해식토기조각이 수습되었다.
유배문학으로서 김구의 「화전별곡」,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 유의양(柳義養)의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등은 조선시대 유배지였던 남해군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성지로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설천면 진목리의 대국산성(경상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과 임진왜란 당시에 축성한 남면 상가리의 임진성(경상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 그리고 옥기산성(玉岐山城) · 금오산성(金鰲山城) 등의 산성이 있다. 이 밖에 상주포성(尙州浦城) · 미조진성(彌助鎭城) · 평산포진성(平山浦鎭城) · 노량진성(露梁鎭城) · 당항포성(唐項浦城) · 창선성(昌善城, 혹은 鎭洞鎭城) 등의 수군의 진성(鎭城)과, 1597년(선조 31) 왜군이 축성한 남해읍 선소리의 천남대왜성지(天南臺倭城址)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남해 객관의 동루(東樓)였던 주변루(籌邊樓)는 ‘변방의 방비를 계획, 강구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존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 경관이 빼어나고 조선태조와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상주면 상주리의 남해금산(경상남도기념물, 1974년 지정)에는 남해금산봉수대(경상남도 기념물, 1987년 지정)가 있다. 양아리에는 남해 양아리 석각경상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이 전한다. 이는 편평한 자연암에 화상문자(畫象文字)를 새긴 것으로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고려 말기 왜구토벌에 전공을 세운 최영(崔瑩)의 사당인 무민사(武愍祠)는 미조면 미조리에 있으며, 관음포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한 정지를 기리는 정지석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은 고현면 대사리에 있다. 조선시대 유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설천면 노량리의 남해충렬사(사적, 1973년 지정)와 고현면 차면리의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사적, 1973년 지정)이다. 이충무공전몰유허에는 이충무공유허비와 이충무공사적비가 있다. 설천면의 노량(露梁)은 400여 년 전에 형성된 역사적인 곳이다. 한양에서 이곳으로 귀양 오는 선비들에게 노량 앞바다의 물결이 마치 이슬방울이 모여서 교량을 이룬 듯이 보여, 고향 떠난 사람으로 하여금 향수에 젖게 한다고 해서 ‘노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 온다. 1598년(선조 31) 이순신 장군이 이 앞바다에서 순국함으로써 그 얼을 간직한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밖에 남해 객관의 동쪽에는 주변루가 있고, 이동면 용소리에 임진왜란 때 썼던 삼혈포(三穴砲)가 남아 있다.
탑비로는 김구선생적려유허비(金絿先生謫廬遺墟碑)가 설천면 노량리에, 남해 장량상 동정마애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가 남해읍 선소리에, 이이명(李頤命)을 배향했던 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가 북변리에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난대상록수 20여 종 230수 정도가 자생하고 있는 미조면 미조리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을 비롯해 삼동면 물건리의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고현면 대곡리의 남해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 1962년 지정), 남해고현면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창선면 대벽리의 남해창선면의 왕후박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등이 있다.
남면 홍현리에는 남해가천 암수바위(경상남도 민속자료, 1990년 지정)가 있다.
1404년(태종 4) 현령을 둘 무렵에 함께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남해향교가 이 지역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고려 말인 1339년(충숙왕 8) 남해로 퇴거한 백이정(白頤正)이 이곳 지방 자제를 훈도했다고도 전해진다. 임진왜란 뒤에는 이순신의 공훈을 기리는 충렬사가 주민의 발의로 건립되어 1663년 사액됨으로써, 향교와 함께 향리 자제의 교육이 정착되었다. 또한, 김구가 남해로 정배될 때 학도들이 그를 따라와서 배웠다. 1721년(경종 1)에는 이이명이 오늘날의 북변리으로 정배되어 와서 학사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1828년(순조 28) 그의 후학들은 그 자리에다 봉천사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백이정의 유적지에는 난곡사(蘭谷祠)가 세워졌고, 1853년 서면 중현리에는 운곡사가 건립되어 선비를 양성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12년 지금의 남해초등학교가 개교한 것을 비롯해 창선 · 성명 · 설천 초등학교 등이 개교, 점차 1면 1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32년 개교한 남해농업실수학교는 1941년 남해공립농업전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38년에는 남해공립수산실수학교가 개교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으며, 남해전문대학이 있다. 남해읍 북변리에는 남해도서관이 있다.
문화행사로 11월 8일은 군민의 날로서 종합문화예술행사가 거행된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석사(石射)놀이와 남승도(覽勝圖)놀이가 있다. 일명 석전(石箭)이라고도 하는 석사놀이는 주로 추석에 씨름대회와 함께 행해진다. 지름 10∼15㎝, 높이 2m 정도의 통나무를 세워놓고 15m의 거리에서 주먹만한 돌을 15개씩 가지고 표적에 던져 맞히는 것이다. 다섯 번 던져서 적중도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데, 준비와 방법이 간단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놀이이다.
지금은 행해지지 않지만 남해읍 서변리에 전래하던 남승도놀이는 한지에다 모필로 중국의 고적 명승지를 기록하고, 그 진로의 순서를 표시한 것이다. 사객(詞客) · 우사(羽士) · 미인(美人) · 치의(緇衣) · 검객(劍客) · 어부(漁夫) 등이 나와 경쟁하는 놀이이다. 이 밖에도 농악 · 줄다리기 · 활쏘기 등이 전해지며, 어린이들은 말놀이 · 까막잡기 · 고누 등의 놀이를 즐겼다.
동제는 당산신을 모시는 당산제가 대부분이다. 창선면에는 당집이 있지만 대개 당목을 신수(神樹)로 삼고 있다. 제일은 음력 10월 보름날이나 섣달 그믐날이다.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한 정인(淨人)을 마을회의에서 선출하며, 선출된 사람은 3일에서 길게는 1개월 정도 근신하게 된다. 이동면 무림리의 동제는 당산제 · 야제의 순으로 지낸다.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오악산 신령에게 지내고, 야제는 잡귀의 퇴치를 위해 잡귀신에게 지낸다. 제일은 10월 보름날 밤 9시로 당산제는 당산에서, 야제는 평지보다 45㎝ 가량 높고 둘레가 10㎝ 정도 되는 돌무덤인 ‘밥무덤’에서 지낸다. 보름 전에 동회에서 뽑힌 제관은 그날부터 제를 지낸 뒤 3일이 지날 때까지 집 근처에 황토를 뿌려놓고 근신한다. 제일에는 국 · 밥 각 다섯 그릇의 제물을 차리고, 헌관 3명과 집사 · 집례 · 대축으로 된 5명의 제관, 부정타지 않은 동민 전원이 신당에 모여 당산제 · 야제를 지낸 뒤 밥무덤에 밥을 묻는다. 밥구덩이를 팔 때는 반드시 도끼뿌리로 파고 밥을 넣은 뒤에는 돌로 덮는다. 이 밖에 남면 홍현리 마을의 바닷가에서는 풍어제를 지낸다. 수미륵 · 암미륵이라 하는 남녀를 상징하는 바위에 음력 10월 23일 마을의 전주민이 모여 평화와 풍어를 비는 제를 지내는 것이다.
이 고장의 설화는 지명유래설화, 자연물에 얽힌 설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가 주류를 이룬다. 설천면과 고현면 사이에 있는 대국산성에는 축조유래담이 전한다. 설천면 비란리 대국산 밑에 의좋은 형제가 살았는데, 한 처녀를 똑같이 사랑하게 되었다. 형제는 서로 애만 태우다가 형이 먼저 동생 ‘청’에게 “그녀가 두루마기를 짓는 동안 나는 30관의 쇠줄을 발에 묶고 20리 되는 읍에까지 갔다오기로 하고, 너는 대국산에 성을 쌓기로 하여 이긴 사람이 그녀와 혼인하기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동생 청이 먼저 성을 쌓자 형은 미리 약속한 대로 가슴을 찔러 죽고 말았다. 형을 잃은 청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왜구가 침입하자, 청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을 이용해 왜구를 격퇴하였다. 지금도 대국산성에는 왜구의 대포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동면 금산의 상사바위에는 주인의 딸을 사랑한 하인의 설화가 전해 온다. 주인의 딸을 사랑하다 죽은 돌쇠는 죽어서 뱀이 되어 딸의 방으로 들어가 몸을 칭칭 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주인은 꿈에 본 노인의 말대로 금산에서 제일 높은 벼랑으로 딸을 데리고 가 굿을 하였다. 한참 만에 뱀이 풀어져서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으니, 이후 이 벼랑을 상사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남해읍에서 5㎞ 떨어진 무지개골에는 무지개 때문에 헤어진 부부의 이야기가 지명유래담으로 내려온다. 이 마을에는 금실 좋은 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무지개를 따라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딸을 데리고 기다리던 아내는 무지개가 뜨면 남편을 부르며 무지개를 향해 걷다 쓰러지곤 하였다. 해가 가도 오지 않는 남편을 위해 남편이 사라진 곳 부근의 바위에서 무사하기를 빌던 아내 앞에 산신령이 나타나 남편이 간 방향을 일러주었다. 그러나 가도가도 끝이 없어, 남편을 찾지 못한 채 아내는 무지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뒤 이 마을을 무지개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장자못 유형의 「달구산전설」, 유성룡(柳成龍)의 형 운룡(雲龍)의 지략으로 왜군을 무찔렀다는 「가청곡전설」, 해마다 풍어제를 올리는 가친미륵불에 관한 전설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노동요가 중심이 되며, 어업노동요와 농업노동요의 비중이 비슷하다. 선율은 메나리토리권이나 전라도와의 내왕이 쉽고 빈번해 육자배기토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정자소리」라고도 하는 모내기노래는 “이논에 모를심어/감실감실 영화로다…….”와 같은 보편적인 사설과 가락으로 불린다. 논매기노래로는 “에허여어 상사디―요/여봐라 농부야 말들어라…….”와 같은 ‘상사디어’형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저건네라 갈미봉에/비가 묻어서 돌아온다…….”라고 하여 전형적인 「육자배기」를 부르기도 한다. 밭매기노래는 모내기노래의 사설을 사용해 여음 없는 장절형식의 메나리토리로 부른다. 그러나 ‘도’음이 낮아 육자배기토리로 들린다.
어업노동요인 「노젓는 노래」는 “어여차 예어차 에―”와 같은 여음에 작업을 지시하는 단순한 사설이 들어 있으며, 가락이 우리 나라 고유의 3분의 3분박자로 되어 있다. 「그물 당기는 노래」 또한 호흡을 맞추기 위한 여음 위주의 노래이나 일본 곡조의 영향을 받았다. 「고기푸는 노래」는 “(앞소리)이가래가 누가랜고/(뒷소리)어넝성 가래야/우리배선주 돈가래다/어넝성 가래야…….”라는 가래소리로 메기고 받는 선후창으로 부른다.
여성노동요로는 「베틀노래」 · 「방아노래」 등이 있고, 여러 일에 두루 부르는 「시집살이노래」도 많다. “임아임아 서방임아/밥상받고 호령마라/실날같은 법아니면/마주앉아 호령하겐만은…….”이라 하여, 시집살이의 고난 · 시련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위엄이 법도에 의지한 허위임을 폭로하기도 한다. 기타 노동요로는 “어떤 사람은 팔자좋아/고―광실 높은집에 부귀영화로 잘사는데/이놈팔자는 무삼팔자로…….”라 하여 전형적인 메나리토리로 부르는 나무꾼 신세타령이 있으며,
의식요로는 「상여노래」가 있다. 이 밖에도 금산의 경치를 노래한 「금산」, 이 고장의 명물 유자를 노래한 「염불가」 등이 있다. 아리랑류에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 많이 있다. 특히, “잠자기 좋기는 시아비 아들/산차지 물차지는 총독부 차지/이내몸 차지는 정든임 차지…….”와 “일본땅에 범나비는 조선땅에 꽃을두고/다달이 못올망정…….”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
임야면적이 67%로 우리나라 섬 중 산의 비율이 가장 많은 지역이어서 농지는 22.3%에 불과하다. 총 경지면적은 79.9㎢로서 전체면적 중 경지면적이 점유하는 비율은 23.1%이다. 도시적 토지이용이 나타나는 남해읍의 면적도 27.13㎢에 불과해 나머지 239.6㎢가 지목상 임야나 기타 지구로 되어 있다. 시가구역에 해당되는 남해읍의 면적 중 도시계획이 적용되는 용도지역면적은 주거지역 1.14㎢, 상업지역 0.15㎢, 공업지역 0.06㎢이며, 잔여면적은 농촌적 성격의 토지로 되어 있다.
경지이용 상황을 보면 논이 48.68㎢, 밭이 31.18㎢로서 각각의 점유비는 논이 60.9%, 밭이 39.1%로 되어 논이 밭보다 절반 이상이나 넓은 규모를 지니고 있다. 이는 도서지방에 해당되며 평야의 비중이 극히 협소한 가운데서도 산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해 가능한 주곡의 경작에 역점을 두는 주민들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이동면 · 창선면 지구는 수리안전답의 비중이 80%를 상회한다.
농가호수는 8,481호이며, 농가인구는 1만 9280명으로서 농가인구율은 38%에 해당된다. 이는 도내 총 농가인구율 16.4%보다 높아서 농업에의 의존도가 아직 높은 지역에 속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주곡인 쌀 외에도 보리 · 잡곡 · 콩 · 고구마 등이 주로 생산된다. 소채 및 특용작물의 재배와 목축은 자급자족적 의미의 미미한 수준에 놓여 있다.
해안은 굴곡이 심하고 302㎞에 달하는 긴 해안선이 있어, 어족 자원이 풍부하고 연근해 어업의 전진 기지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럭, 광어, 전복, 우렁쉥이, 피조개, 굴, 미역, 바지락, 보리새우 등의 양식적지이며, 연안 바다에는 감성돔, 삼치, 멸치, 도다리 등이 많이 잡히고 있다. 선박의 출어와 수산물 가공 등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6년 미조항을 어업전진기지로 삼고 제빙공장, 수산물 판매장, 냉동설비 등을 갖추어 수산 남해의 소득 증대에 힘쓰고 있다. 또한 상주에는 국립수산진흥원에서 설치한 수산종묘배양장이 있어 종묘생산과 기술보급에 힘쓰고 있다.
공업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으나 음료 · 화학 · 의복 · 비금속 제품 등이 생산되며 특히 고현농공단지의 동은산업은 세계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업체로서 남해군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산업구조를 요약하면 농수산업 등 1차 산업의 비율은 전체 산업의 68%이며 도내의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광공업 등 2차 산업은 전체 산업의 3%로서 대단히 미약한 편인 데 비해 판매 및 서비스업을 위주로 하는 3차 산업의 비중은 29%로서 다소 큰 편이다.
이는 이 지역이 한려해상의 경관이 아름다운 도서지역에 속하여 여름철에 외부의 관광객이 남해대교 · 상주해수욕장 등의 피서 및 관광을 위해 적지 않게 이 지역을 방문함으로써 서비스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시장은 10개의 정기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해읍의 남해상설시장이 1·7일, 남면장과 지족장이 4·9일, 이동면 무림장이 5·10일에 열리고, 지족장과 고현장이 4·9일 열린다. 요즈음에는 대중교통의 발달로 주민의 대부분이 남해읍의 상설시장을 이용하고 있다.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해 하동군과 육로가 연결되었으며, 1980년 창선교가 놓여 본 섬과 창선도가 연결되었다. 2003년 창선 · 삼천포대교가 개통되어 사통팔달의 육지와 상호 교통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공용터미널이 1997년에 완공되었으며, 각 면소재지에 점차적으로 외곽도로를 신설, 확장하고 있다. 해상교통은 부산 · 여수 · 통영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해도는 예로부터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데다 물과 공기가 맑고 깨끗한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특히, 섬의 남단에 있는 금산과 상주해수욕장은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절경을 이룬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얽혀 있고 난대림이 울창한 금산은 예로부터 소금강산으로 불릴 정도로 남해안 최고의 명승지이다. 일출의 장관을 맛볼 수 있는 망대(望臺)를 비롯해 산정의 보리암 · 문장암(文章巖) · 대장봉(大將峰) · 삼불암(三佛巖) · 쌍홍문(雙虹門) · 팔선대 등은 ‘금산 38경’으로 불리는 자연조각품이다.
한려수도를 굽어보면서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반달 모양의 포구를 이루는 상주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모래가 곱고 수심이 얕기로 유명해 여름철 피서객이 끊이지 않는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전적지인 노량에는 1657년(효종 8)에 건립한 충렬사와 1952년에 건립한 이순신공덕기념비 등이 있다.
또한, 한려수도의 명물인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있어서 이 다리 위에서 바라다보면 한려수도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1973년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고, 숙박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이 고장에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미조항의 해산물축제에서는 미조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갈치회를 맛볼 수 있다. 남해군 전역에서 매년 정초에 이루어지는 보물섬해맞이축제와 상부정월대보름달맞이축제는 이 고장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민속예술행사이다. 2년마다 개최되는 화전문화제는 민속놀이와 예술행사, 체육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다.
문화 시설로 공공공연장 1개소와 향토역사관 1개소가 있다.
2003년에 완공된 서면 서상리의 스포츠파크는 남해군의 대표적인 체육시설로서 축구장, 야구장, 테니스장, 풋살경기장, 중앙공원, 야외공연장, 대한야구캠프, 스포츠파크호텔, 아천문화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군의 서부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27.2㎢, 인구 1만 3917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북변리이다. 본래 남해면이었으나 1979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읍을 중심으로 북쪽에 강구산, 서쪽에 관대봉, 남쪽에 괴음산, 동남쪽에 월구산이 에워싸고 있다. 서쪽은 대부분 산지이고, 동쪽은 바다와 접한 해안으로 평야를 이룬다. 농경지는 해안의 평야지대에 발달하고 있으며, 서쪽의 산간계곡을 흘러내리는 소규모의 하천들이 이루어놓은 골짜기에도 논이 많다. 특히, 차산리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고, 북변리 · 평현리 · 남변리 · 선소리 일대와 토촌천 유역의 입현리에도 논이 넓게 분포한다. 해안을 따라 농경지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며, 농업용수의 공급을 위한 저수지가 많아 벼농사에 도움을 준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50% 이하이다. 쌀 · 보리 기타 잡곡류와 복숭아 · 감 · 밤 · 유자 · 비자 · 치자 등 과실나무와 각종 채소가 생산된다. 특히, 마늘 생산량이 많다. 한우 · 돼지 등을 사육하며 최근에는 양식업이 점차 발달하고 있다.
남해대교를 통하는 국도가 읍의 중심지를 지나고, 또 군내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발달해 교통의 중심지가 될 뿐만 아니라 군청이 위치해 행정의 중심지도 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북변리에 남해향교와 봉천사 묘정비가 있으며, 이 밖에 남해읍성지와 왜군이 축성한 천남대왜성지가 있다.
북변(北邊) · 서변(西邊) · 남변(南邊) · 차산(車山) · 선소(船所) · 심천(深川) · 아산(牙山) · 평현(平峴) · 평(坪) · 입현(笠峴) 등 10개 리가 있다.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8.90㎢, 인구 3,91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사리이다. 신라 신문왕 때 전야산군의 소재지였으며 군내면(郡內面)이라 불렸다. 고려 공민왕 때 진주군의 대야천면에 속한 일도 있으나 조선 태종 때 군의 설치와 함께 이속되었다. 전야산군의 옛 현소재지였으므로 이름을 고현면이라 하였다. 대곡리의 양지에서 발원한 대곡천(大谷川)이 동쪽으로 흐르며, 북쪽의 남티리 덕신재에서 발원한 대사천(大寺川)이 남서쪽으로 흐른다. 상류에 남티저수지가 있다. 서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많은 섬이 있다. 북쪽에 녹두산(鹿頭山, 451m), 남쪽에 삼봉산(三峰山, 423m)이 각각 솟아 있다.
농경지는 전체 면적의 36%로, 농가 호당 경지면적은 0.57㏊에 불과하다. 마늘이 특산물로 재배되고 있다. 농사 못지않게 수산업 분야도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특히, 갈화리에서는 흰다리새우가 특산물로 대량 양식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대곡리에 지석묘군이 있고, 도마리의 삼봉산 줄기와 이어지는 높이 50m 정도의 언덕에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가 있다. 차면리에 있는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에는 이충무공유허비와 이충무공묘비 등이 건립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남해산닥나무 자생지와 남해고현면의 느티나무가 있다.
대사(大寺) · 이어(伊於) · 대곡(大谷) · 도마(都馬) · 오곡(梧谷) · 포상(浦上) · 남티[南峙] · 차면(車面) · 갈화(葛花) 등 9개 리가 있다.
군의 남쪽에 위치한 면. 면적 43.50㎢, 인구 3,85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당항리이다. 본래 남해군의 지역으로, 신라 신문왕 때부터 남면이라 칭하고 집강(執綱)을 두었다가 1907년부터 면장을 두었다. 덕월 · 평산 · 상가 · 유구(鍮九) · 죽전 · 우형(牛形) 등 11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동쪽으로 앵강만을 끼고 있으며, 북쪽의 천황산에서 발원한 상가천(上加川)이 남서쪽으로 흐른다. 중앙의 망기산에서 발원한 오리천(五里川)이 동쪽으로 흘러간다. 서쪽과 남쪽은 여수만(麗水灣)을 경계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로 구분된다.
주요 농산물은 밭작물로 보리가 많이 생산된다. 특히, 고구마와 치자는 군 생산량의 40%를 차지한다. 문화유적으로는 홍현리의 입석과 소흘산의 봉수, 당항리의 석탑이 있다. 봉수대는 남해안의 왜구 침입을 금산과 사천 등지에 연락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높이 6m, 너비 7m의 유구가 아직도 산꼭대기에 남아 있다. 평산리에는 평산포진성, 홍현리에 가천암수바위, 덕월리에는 임진왜란 때 민 · 관 · 군이 합심해 쌓았다는 민보성(民保城, 일명 壬辰城)이 있고, 성 안에는 우물터 · 건물터 · 성문터가 남아 있다.
당항(唐項) · 석교(石橋) · 홍현(虹峴) · 선구(仙區) · 임포(荏浦) · 평산(平山) · 상가(上加) · 덕월(德月) · 죽전(竹田) 등 9개 리가 있다.
군의 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15.70㎢, 인구 2,66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미조리이다. 1944년 삼동면 미조리 및 송정리가 미조출장소가 되어 삼동면과 독립적으로 행정업무를 해오다가 1986년 면으로 승격되었다. 삼면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해안선의 총연장은 38㎞에 달하고 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10% 남짓에 불과한 형편이므로 주민들 대부분이 어업 소득에 의존하고 있다. 연근해에 어업 전진기지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어선의 출입항이 자유롭고, 정치망어업과 어류축양업이 활발하다. 특히, 멸치 · 장어 · 삼치 등의 어획과 양식된 우렁쉥이 · 전복 · 피조개 등이 상당량에 달한다.
교통은 국도 3호선과 19호선의 시종점이 되어 편리한 편이다. 주위에 조도 · 호도의 2개 유인도와 12개의 무인도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미조리에 무민사와 미조진성이 있고, 천연기념물로 미조상록수림이 있다. 관광지로는 송정해수욕장이 유명하다.
미조(彌助) · 송정(松亭) 등 2개 리가 있다.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51.20㎢, 인구 4,09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지족리이다. 조선 태종 때 금산 아래에 6개동으로 조직되어 있다가, 1818년(순조 18) 다시 9개 동으로 개편되면서 남해읍내에서부터 동쪽으로 세 번째의 면이라 하여 삼동면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동면의 금산에서 발원한 동천(洞川)이 북동쪽으로 흐른다. 북쪽은 지족해협(知足海峽)을 사이에 두고 창선면을 마주보고 있으며, 강진해를 끼고 있다. 남쪽은 미조만(彌助灣)을 끼고 20여 개의 섬이 산재해 있다. 절경인 금산 아래 위치한 까닭에서인지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 그래서 남해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수촌으로 꼽힌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22%이다. 개불양식이 활발해 특산물로 꼽힌다. 문화유적으로는 봉화리에 삼층석탑, 물건리에 물건방조어부림이 있다.
지족(知足) · 영지(靈芝) · 금송(金松) · 동천(洞天) · 봉화(鳳花) · 물건(勿巾) 등 6개 리가 있다.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3.8㎢, 인구 1,73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주리이다. 본래 남해현의 일부지역이었다. 신라의 [원효]가 전국 각지를 순례하다가 보광사에서 쉬면서 화엄경을 강론할 때 각처 사람들이 찾아와 편히 살 수 있는 곳을 묻자 ‘산하상주(山下常住)’라 하였다. 후세인들은 이를 상주(尙州)라 표기했으며, 그 뒤 많은 사람이 이 고장에 고을이 형성될 것이라 예언하고 지명을 상주라 썼다. 경덕왕 때부터는 이동면으로 불려왔으며, 1942년에는 이동면에서 분리, 상주출장소가 설치되어 양아리와 상주리를 관할하였다. 1957년에 출장소 폐지로 다시 이동면에 합병되었다가 1970년 상주출장소가 다시 부활되었다. 1986년 면으로 승격하였다. 지세는 80% 이상이 험준한 산악으로 되어 있으며, 금산 · 천황산 · 상주해수욕장 등이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연중 관광객이 즐겨 찾는다. 남해 금산은 옛날 이성계(李成桂)가 200일 기도로 산신의 영험을 얻어 등극했다는 전설로도 유명한 산으로, 38경을 자랑할 만큼 산수가 수려하고 남한의 금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면에는 유인도인 노도와 4개의 무인도가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고구마 · 마늘 등이 생산된다. 연안의 바다에는 볼락 · 우렁쉥이 · 성게 · 전복 · 미역 · 우뭇가사리 · 해삼 · 멸치 등이 어획, 채집되고, 피조개 양식도 활발하다. 특히, 성게와 전복은 맛이 좋아 이 고장 특산품으로 손꼽힌다.
문화유적으로는 보리암과 상주성 등이 있다.
상주(尙州) · 양아(良阿) 등 2개 리가 있다.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1.0㎢, 인구 2,96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상리이다. 조선 세종 때는 농면(農面)이라 하여 집강에 의해 다스려지다가 1906년 면장제로 바뀌었다. 남해읍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면이라 불린다. 면의 서쪽은 여수만을 사이에 두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룬다. 면내에는 망운산 · 증봉(甑峰, 542m) · 관대봉(595m) 등이 있다.
농경지는 전체면적의 23%를 차지하나 대부분 산간지에 위치한다. 주민의 대부분이 긴 해안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에 힘입어 높은 소득을 올린다. 특산물로는 고구마가 재배되고, 피조개가 양식된다. 교통은 해안 일주도로와 남해읍에서 서상리까지 8km가 확장, 포장되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으로 대정리의 옥기산(254m)에 작은 산성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쌓았다고 전한다. 서호리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모여 훈련을 받았다는 대장군지(大將軍址)가 있으며, 중현리에는 조선시대 유학자인 정희보(鄭希輔)를 봉안한 운곡사가 있다. 남상리망운산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쓴 미공군전공기념비가 있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폭격기가 작전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다가 추락한 곳에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상(西上) · 연죽(堜竹) · 대정(大丁) · 서호(西湖) · 작장(勺長) · 남상(南上) · 노구(蘆九) · 중현(中峴) · 정포(井浦) 등 9개 리가 있다.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4.90㎢, 인구 3,17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남양리이다. 본래 남해군의 지역으로 설천면이라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다. 남해대교가 하동군 금남면과 연결되어 있다. 동쪽에는 금음산이 있다.
농경지는 전체면적의 35%이다. 농사 외에 수산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6개의 무인도와 북동쪽으로 해안선이 있어 연근해 어업이 이루어진다. 이 밖에 굴 · 피조개 · 바지락 · 김 등의 양식장이 있으며, 특히 김은 품질이 뛰어나 다른 지역으로 잘 팔려 나간다.
문화유적으로는 대국산의 산정에 둘레 1.5km, 높이 5∼6m, 너비 2.4m의 대국산성이 있다. 성의 가운데에는 연못 · 건물터가 있고 성벽의 요소요소에 초소가 있으며, 성 밖에도 방어시설이 있다. 노량리의 성터는 남해관성(南海關城)과 같으며, 석성의 둘레는 약 1.5km로 성 안에 건물터가 남아 있다. 또한, 노량리에는 충렬사가 있다.
남양(南陽) · 비란(非鸞) · 진목(眞木) · 문항(文巷) · 금음(金音) · 문의(文義) · 노량(露梁) · 덕신(德申) 등 8개 리가 있다.
군의 남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47.05㎢, 인구 4,20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무림리이다. 본래 남해군의 지역으로서 조선 태종 때부터 이동면이라고 불려왔다. 1894년 이동면은 성남면(城南面)과 이동면으로 분리되어 집강에 의해 다스려지다가 1906년 다시 성남면과 합병, 이동면이 되었다. 남해읍으로부터 동쪽에 위치하므로 이동면이라 불리게 되었다. 금산에서 발원한 복곡천(福谷川)이 북서쪽으로 흘러 앵강만으로 들어간다. 서쪽의 송등산에서 발원한 다천천이 북으로 흘러 강진해로 들어간다. 상류에 다정저수지(茶丁貯水池)가 있다.
논과 밭의 비율은 2:1로 밭작물의 생산량이 비교적 많다. 특산물로는 봄무가 유명하다. 이 밖에도 흑염소 · 소 · 돼지 등의 가축이 농가소득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1973년 6월남해대교가 개통되면서 금산이 갑자기 관광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금산은 소금강산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삼남 유일의 절승영악(絶勝靈嶽)이며, 금산 38경으로 유명하다. 1981년에는 남해대교에서 미조를 잇는 국도 19호선이 포장되어 더욱 편리해진 교통으로 관광객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속칭 ‘서불고차비[徐巿過此碑]’라 전하는 석각무늬가 자연석에 새겨져 있으나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용소리에 있는 용문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기지였던 관계로, 숙종 때 수국사(守國寺)로 지정되어 왕실의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
무림(茂林) · 다정(茶丁) · 초음(草陰) · 석평(席坪) · 신전(薪田) · 화계(花溪) · 용소(龍沼) · 난음(蘭陰) 등 8개 리가 있다.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4㎢, 인구 5,81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신리이다. 본래 진주군 지역으로 창선면이라 하였다. 1906년 남해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면은 군의 북동쪽에 위치한 창선도라는 큰 섬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지대에 속한다. 동쪽은 한려수도와 접하고, 서쪽은 남해와 접해 있다. 남쪽은 지족해협을 사이에 두고 삼동면과 창선교로 연결된다. 북쪽은 동대만(東大灣)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연태산(蓮台山, 339m) · 속금산(束錦山, 358m) · 대방산(臺方山, 468m) 등의 산이 있다. 행정상으로는 남해군에 속해 있으나 생활권은 사천시에 속한다.
면의 70% 이상이 임야이며, 논과 밭의 비율은 1.4:1이다. 특산물로 유자가 재배되고 있다. 사면이 바다인데다가 굴곡이 좋아 질좋은 조개류가 명산물로 꼽힌다. 남해대교가 개통되면서 남해가 육지화되고 2003년에는 창선삼천포대교가 준공되어 삼천포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으로는 당항리에 고인돌군, 진동리에 국사봉사당(國祀峰祠堂)이 있다. 또한, 진동리에는 구암사(龜巖寺)터라 전하는 곳과 선조 때 쌓았다는 진성터가 남아 있다. 당항리의 북쪽에는 둘레 2㎞, 높이 3m로 임진왜란 때 쌓았다는 금오산성이 있다. 동대리의 속금산에는 진주와 연결되는 금산봉수대(錦山烽燧臺)가 있다. 옥천리의 대방산은 남면의 설흘산봉수(雪屹山熢燧)와 이어지게 된다. 천연기념물로는 높이 9.5m, 하부둘레 11m, 수령 500년인 황후박나무가 대벽리에 있다.
상신(上新) · 동대(東大) · 당항(堂項) · 대벽(大碧) · 율도(栗島) · 서대(西大) · 광천(廣川) · 옥천(玉川) · 지족(只族) · 당저(堂底) · 상죽(上竹) · 수산(水山) · 부윤(富潤) · 가인(加仁) · 오용(五用) · 진동(鎭洞) 등 16개 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