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함양 출신. 예조참판 노숙동(盧叔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노분(盧昐)이고, 아버지는 참봉 노우명(盧友明)이며, 어머니는 사성원 권시민(權時敏)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고, 전적·예조의 낭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높은 치성(治聲)을 들었으며 청백리로 뽑혔다.
1558년(명종 13) 필선·부응교가 되고 이듬해 장령·검상·사인·집의·직제학을 지냈다. 1560년(명종 15) 형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는데,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지원하여 담양부사·진주목사를 지냈다.
1567년(명종 22) 이조참의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들어왔다. 1571년(선조 4)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다시 외직으로 나갈 것을 허가받아, 친가와 가까운 곤양(昆陽)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이조참의가 되고 경상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그 뒤 대사헌·이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의 벼슬에 연배(連拜)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 기대승(奇大升)·노수신(盧守愼)·김인후(金麟厚)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효로써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남원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함양의 당주서원(溏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옥계문집(玉溪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