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문종 때 창건하였다고 하나, 세전(世傳)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이 당나라 군사를 묘한 언변으로 제압한 뒤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탑을 건립하였다.
또 철우(鐵牛)와 철환(鐵環)을 설치하고 호산(虎山)과 용담(龍潭)에도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 뒤 이 절은 남원 일대의 대찰(大刹)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수백 명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은 예로부터 남원 8경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또 조선 세조 때의 김시습(金時習)은 이 사찰을 배경으로 불교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지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왜적이 남원 서문을 통과하여 이 절에 와서 방화를 하였으므로 이 절은 2칸의 불전과 석불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 버렸다.
당시에 불탄 건물로는 대웅전 · 약사전(藥師殿) · 장륙전(丈六殿) · 영산전(靈山殿) · 보응전(普應殿) · 종각(鐘閣) · 천불전(千佛殿) · 나한전(羅漢殿) · 명부전(冥府殿) 등이었다고 한다.
그 뒤 1678년(숙종 4) 남원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중창을 꾀하였으나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예전처럼 꾸미지는 못하고 승방(僧房) 1동을 지어 불전에 올리는 향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현재의 절터에 남아 있는 국가유산으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만복사지오층석탑과 만복사지석좌, 만복사지당간지주, 만복사지석불입상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석물들이 남아 있으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쳐 전북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