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출생지는 경기도 안성의 죽산(竹山) 혹은 진위(振威)라고 하며, 전라도 전주라고도 하여 확실하지 않다. 만년에 전주에서 살았다.
송흥록(宋興祿)의 후배로 ‘고동상성’이라 하여 높은 소리를 잘 질러내어 후세사람들이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고종으로부터 동지(同知)의 직을 제수받은 그가 평양감사의 초청으로 평양 연광정(練光亭)에서 소리를 할 때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 하며, 이때의 판소리도(圖)가 전해지고 있다.
「적벽가」와 「춘향가」를 잘 불렀고, 당시 「적벽가」로는 그를 당할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더늠으로 전해지고 있는 「춘향가」‘이별가’ 중 ‘날 데려 가오’하는 대목은 높은 소리를 계속 질러내는 그의 특징적인 고동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재효(申在孝)도 「광대가(廣大歌)」에서 “모동지 흥갑이는 관산만리(關山萬里) 초목추성(草木秋聲) 청천만리(靑天萬里) 학(鶴)울음 시중성인(詩中聖人) 두자미(杜子美)”라 평하였는데 학의 울음소리가 바로 고동상성을 이른 것 같다.
특히, 이 대목을 강산제(岡山制)라고 하는데 박유전(朴裕全)의 강산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강산제는 산조의 강산제와 음악적 특징이 일치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이가 빠져 소리를 입술로 조정하여 불렀다.
이것이 그의 독특한 순음(脣音) 더늠으로 후대의 주덕기(朱德基)에 의해서 방창(倣唱)되어 세상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