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인간의식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선과 악과 무기의 3성(性)으로 구분하는데, 이 중 무기는 선악의 분별이 없는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 흑백 등의 상태가 분명한 것을 유기(有記)라고 하는데, 선·악이라고 분명히 규정지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라고 한다. 따라서 유기의 선과 악에는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따르지만, 무기에 대해서는 어떤 과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기의 업(業)에 대해서는 자성(自性)에 기록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무기는 덮어 가릴 수 있는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덮어 가릴 수 없는 무부무기(無覆無記)로 크게 나뉜다. 유부무기는 번뇌에 오염되어 능히 수행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고, 무부무기는 수행 자체에는 방해를 주지 않는 무기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유부무기를 제거해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가종(瑜伽宗)·자은종(慈恩宗) 계통에서 무기에 대하여 많이 취급하였으나, 독창적인 학설 등은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승려들의 선수행(禪修行)에서 이 무기를 타파하는 문제가 크게 대두됨에 따라 선종(禪宗)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을 세워서 선을 닦는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에서 마음이 밝게 깨어 있는 성성(惺惺)의 상태로서 아무런 생각 없이 흐리멍덩한 무기를 다스리고, 고요한 적적(寂寂)으로서 분별하는 가지가지 생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또, 『수심결(修心訣)』에서는 정(定)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혜(慧)로써 무기를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으며, 마음이 고요하기만 하고 밝은 혜가 없으면 혼침하여 무기의 상태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 말의 나옹(懶翁)은 “고요한 가운데 화두(話頭)가 없는 것을 무기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중기 이후 선종에서는 참선수행에서 무기의 상태에 떨어지는 것을 크게 금기로 삼았고, 오히려 산란한 마음의 상태보다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는 것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선수행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