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원(景園), 호는 황사(黃史), 사호(賜號)는 지당(芝堂). 서울 출신.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의 5세손으로, 민치오(閔致五)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합격한 뒤 민비(閔妃)가 책립되자 중용되기 시작하여 1867년(고종 4) 이조참의로 등용되었고, 1869년 형조참판,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다음 해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민비의 참모 가운데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 축출에 힘썼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민씨정권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민씨일족의 대표적 정객으로 정권에 깊숙이 참여하게 되었다.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고, 무위영도총제(武衛營都摠制)를 역임하였다.
그 뒤 민씨정권 내 쇄국을 지양하고 개항할 것을 내세우는 개국론(開國論)을 주장하여 조선왕조 개항의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78년 10월 우의정에 서임되었으나 7일만에 사망하였다. 서예에 능하였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