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보집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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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보집설 / 신관호
민보집설 / 신관호
조선시대사
문헌
조선후기 무신 신헌이 민보방위에 관해 1867년에 간행한 군서.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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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무신 신헌이 민보방위에 관해 1867년에 간행한 군서. 병서.
내용

1책. 활자본. 조선은 병자호란 이래 230여년간이나 군사적인 태평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186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경(北京) 함락의 소문, 서양 선박들의 빈번한 표착(漂着)과 통상 요구, 병인양요 등 서양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조정과 연해변은 심각한 위기의식과 소란에 빠지게 되었다.

군사적으로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던 조선 정부는 쇄국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만성적인 재정 궁핍과 군사 행정의 심한 부패 때문에 관이 주도해 농민을 징발하고 군대를 유지하는 일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연해변의 많은 유생들은 요충지마다 산성을 쌓고, 병란이 터지면 농민들이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민보방위론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미 1812년(순조 12) 정약용(丁若鏞)이 『민보의(民堡議)』에서 제시했던 방안이었다.

훈련대장이었던 신헌은 민보방위체제의 시행을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한 끝에 병인양요 이듬해인 1867년 왕의 윤허가 있었다. 이 같은 결정은 민보방위체제만이 내우외환에 직면한 19세기 중엽의 조선이 택할 수 있는 최상의 비변책(備邊策)이요 사회보안책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신헌은 자신이 지방의 무관으로 있으면서 수집한 민보 관계 책자들을 자료로 해서 『민보집설』을 간행하였다. 『민보집설』은 향촌의 인보조직(隣保組織), 요충지의 선정과 보루의 축성 방법, 가용한 무기와 장비, 운영 내규, 그리고 식량 관리 등의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내용은 명나라 사람 윤경(尹耕)이 쓴 『보약(堡約)』, 저자 미상의 『성수서(城守書)』, 그리고 정약용의 『민보의』에서 발췌되었다. 특히 『민보의』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정부에서는 조만간 시행할 민보방위체제에 관한 하나의 시안으로서, 『민보집설』을 간행해 전국의 주요 지역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민보방위에 대한 조정의 정책적 관심은 그 이상의 발전 없이 끝났다.

이는 아마도 정부의 정책 집행능력의 전반적인 부족과 쇄국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실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민보를 기본단위로 한 농민자위체제를 가지고 유명무실한 속오군제(束伍軍制)를 대체하려던 조정의 때늦은 노력은 탁상공론으로 끝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민보집설』은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의 최대 과제가 된 국방과 사회 안정의 문제에 대한 당대 식자들의 여론의 분위기와 조정의 대응 태도를 전해 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참고문헌

「19세기의 새로운 국토방위론-다산의 민보의를 중심으로-」(정경현, 『한국사론』 4,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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