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공진(公振), 호는 죽포(竹圃). 감찰(監察) 박혁수(朴赫修)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송달재(宋達載)의 딸이다. 처음 김상철(金相轍)로부터 수학하다가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이기설(理氣說)에 몰두하였다.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사간원정언·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874년(고종 11) 시폐(時弊)에 대하여,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인한 국정문란의 대책에 대하여, 1884년 갑신정변에 대한 대책 등을 상소하였다. 그 내용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890년 일본세력이 횡행함에 분을 참지 못하여 치사(致仕)하였으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진압에 힘썼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결연히 의병의 뜻을 품었으나 병고로 이루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죽포집(竹圃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