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술 ()

국악
인물
해방 이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전승자로 지정된 기예능보유자.
이칭
청운(靑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2년
사망 연도
1989년
출생지
전라남도 구례
정의
해방 이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전승자로 지정된 기예능보유자.
개설

호는 청운(靑雲). 전라남도 구례 출생. 판소리 명창 만조(萬朝)의 넷째 아들이며 역시 판소리 명창 봉래(奉來)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전라남도 순천과 부산 등지에서 살다가 1970년 서울에 올라왔다.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큰형 봉래로부터 소리를 배우다가 형이 일찍 죽자 아버지 만조와 둘째형 봉채(奉採)로부터 동편제(東便制) 판소리를 터득하였다.

어려서 잠시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송만갑(宋萬甲)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소년 시절에 목이 좋고 공력이 있어 시골에서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과도하게 수련을 하다가 목을 다쳐 고음을 내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다.

한동안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지냈으나 재기하여 천신만고 끝에 다시 목을 얻었지만, 그래도 목이 탁하고 고음이 나지 않아서 암성(가성)으로 소리하였다. 공력이 대단하여 젊은층보다 판소리를 깊이 들을 줄 아는 고로들이 그의 소리를 좋아하였다.

1953년부터 순천에서 오랫동안 국악원 판소리 사범으로 제자를 가르친 것을 비롯하여, 목포·전주·군산·부산 등지를 전전하며 국악원 사범으로 있었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어느 명창보다 순수한 동편제 판소리를 계승하였고 판소리 다섯마당을 다 불렀는데, 특히 「흥보가」·「수궁가」·「적벽가」에 출중하였고, 「춘향가」도 더러 공연하였으나 「심청가」는 그리 능하지 못하여 공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1961년 서울 신세기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흥보가」·「적벽가」·「수궁가」·「심청가」를 각각 대목소리로 음반에 취입한 것을 비롯하여 문화재관리국에서 출판한 ≪한국의 음악≫이라는 문화재 음반전집에 「적벽가」를 취입하였고, 뿌리깊은나무에서 제작한 판소리 다섯마당에 「흥보가」·「수궁가」를 취입하였다.

문하에서 송순섭(宋順燮)·김일구(金一求)·안숙선(安淑善) 등 여러 명창이 나왔는데, 송순섭·김일구가 그를 계승하는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판소리소사』(박황, 신구문화사, 1976)
『명인명창』(동아일보사, 1987)
집필자
이보형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