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현(景賢), 호는 매계(梅溪)이다. 경상도 삼가(三嘉)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참의 박우(朴優)이다. 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김윤우(金允佑)의 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박사겸(朴思兼)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900여 명의 군사를 규합하였다. 봉사(奉事) 노흠(盧欽),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출신의 권세춘(權世春) 등도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박사제는 봉사(奉事) 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곽재우에게 소속되게 하고는 영산(靈山)과 창녕(昌寧) 사이를 오가는 왜적을 물리쳤다. 왜군이 경상도 함안(咸安)을 무너뜨리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宜寧)을 침범하려 할 때 곽재우(郭再祐) 부대의 도총(道總)을 맡아 삼가(三嘉)를 방어하였다. 같은 해 10월 의병장으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의령현감(宜寧縣監)에 임명되었다.
당시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가 경기도 용인에서 왜군에게 패하고 산청으로 돌아왔는데, 곽재우가 김수를 비판하는 격문을 돌렸고, 김수는 조정에 곽재우를 반역죄로 탄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거창(居昌)에 도착하여 곽재우의 격문을 보고 그 전말을 조사할 때 박사제가 적극적으로 곽재우를 변론하였다.
1594년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재직하였다. 1599년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후 대사간 이유중(李有中)과 함께 남이공(南以恭)과 김신국(金藎國)을 탄핵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하였다.
1600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601년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의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6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재직하는 도중에 대사헌 김륵(金玏)과 함께 피혐하면서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를 추숭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김륵은 강릉 부사, 박사제는 함경도도사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