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박명화(朴命和). 자는 희문(希聞), 호는 소하(韶荷). 고양군수 박준설(朴準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큰아버지 외부교섭국장 박준우(朴準禹)에게 입양되었고, 유진오(兪鎭午)의 외숙이다.
1882년(고종 19) 일본에 유학해 이듬해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1894년에 외부주사가 되었다. 1895년 궁내부영선사장(宮內府營繕司長)이 되었다가 1897년 주차일본공사관 2등참사관에 임명되고 주임관 4등에 서임되었다.
1900년 주일특명전권공사를 지낸 뒤 1902년에는 철도원감독(鐵道院監督)과 수륜원감독(水輪院監督)을 겸했고, 이어 외부협판과 수륜원부총재가 되었다.
이듬해 평리원판사(平理院判事)를 거쳐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외부협판 · 철도원부총재 등을 지내고 궁내부협판이 되었다가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로 승진했고, 비원부장(祕苑副長) · 제실제도정리의정관(帝室制度整理議定官)을 겸하였다.
1905년 박용화의 소청으로 단종조(端宗朝) 충신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게 하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특별히 허용하도록 장례원(掌禮院)에서 복주(覆奏)하였다. 같은 해 태극장(太極章) · 팔괘장(八卦章) 등이 서훈되었고, 이어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 · 임시외부대신사무 · 제실회계심사국장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구완희(具完喜) 등과 함께 일본군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해 고종을 협박하고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듬해 조약체결의 공로로 태극장과 팔괘장의 훈장이 다시 주어졌다. 잠시 황해도관찰사로 외직에 있다가 시종원경(侍從院卿) · 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에 임명되었다.
1907년 제실회계심사국장에 재임용되고 이어 임시서리시종원경 겸 내대신사무에도 임명되었다. 이 해 4월 전 주서 나인영(羅寅永)을 비롯해 전 주사 오기호(吳基鎬) · 김인식(金寅植) 등이 박용화를 포함한 을사6적(乙巳六賊)을 처단하고자 1인당 3인씩의 자객을 보냈을 때 그 중 2인이 박용화의 집에 침입해 자상(刺傷)을 입혀 죽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