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전지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전중윤지제교, 원나라 정동성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행산(杏山)
시호
문광(文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50년(고종 37)
사망 연도
1325년(충숙왕 12)
본관
죽주(竹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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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에, 전중윤지제교, 원나라 정동성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竹山). 호는 행산(杏山). 아버지는 전법판서를 지낸 박휘(朴暉)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과거에 급제해 사국(史局)과 한림원의 벼슬을 지냈다.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양반자제를 뽑아 입시하게 하자, 원나라에 들어가 그 곳의 명사들과 사귀어 명성을 떨치고 원나라의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가 되었다. 귀국 후 이부와 병부의 시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안동부윤이 되었다.

재능이 인정되어 전중윤지제교(殿中尹知製敎)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세자(世子: 뒤의 충선왕)의 시강을 맡아 잘 인도하였다. 또한, 세자가 원나라에 있을 때에는 고생을 꺼리지 않았다.

1298년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해 사림원(詞林院)을 두었는데, 이 때 최참(崔旵)·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 등과 함께 사림원학사가 되어 인사행정을 담당했으며, 충선왕의 즉위교서를 지었다.

뒤이어 삼사좌사사림학사 승지(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가 되었고,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 開城府判尹)가 되었다. 그 해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1307년에 판비서시사 권수밀직부사(判秘書寺事權授密直副使)가 되었다.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 8)에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심왕(瀋王)의 무리가 왕을 원나라에 무고하는 글에 서명을 강요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정승(政丞)이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고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에 봉해졌다. 박전지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강직했으나 결단성이 적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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