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竹山). 호는 행산(杏山). 아버지는 전법판서를 지낸 박휘(朴暉)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해 사국(史局)과 한림원의 벼슬을 지냈다.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양반자제를 뽑아 입시하게 하자, 원나라에 들어가 그 곳의 명사들과 사귀어 명성을 떨치고 원나라의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가 되었다. 귀국 후 이부와 병부의 시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안동부윤이 되었다.
재능이 인정되어 전중윤지제교(殿中尹知製敎)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세자(世子: 뒤의 충선왕)의 시강을 맡아 잘 인도하였다. 또한, 세자가 원나라에 있을 때에는 고생을 꺼리지 않았다.
1298년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해 사림원(詞林院)을 두었는데, 이 때 최참(崔旵)·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 등과 함께 사림원학사가 되어 인사행정을 담당했으며, 충선왕의 즉위교서를 지었다.
뒤이어 삼사좌사사림학사 승지(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가 되었고,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 開城府判尹)가 되었다. 그 해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1307년에 판비서시사 권수밀직부사(判秘書寺事權授密直副使)가 되었다.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 8)에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심왕(瀋王)의 무리가 왕을 원나라에 무고하는 글에 서명을 강요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정승(政丞)이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고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에 봉해졌다. 박전지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강직했으나 결단성이 적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