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벽동 출신.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이다.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마치고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뒤 1923년 중국의 금릉대학(金陵大學)과 1926년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에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에서 기독교 변증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곧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시작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박형룡이 1931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33년에는 루이스빌의 신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8년 6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일본 동경으로 피신하여 성경주석의 집필에 전념하다가 1942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옮겨가 동북신학교의 교수와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1947년 7월까지 그 일을 계속하다가 고려신학교 측에서 파견된 목사 송상석(宋相錫)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6월에는 교단 내부의 문제로 사임한 뒤,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고 1953년에는 총회직영의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 은퇴한 뒤로는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50여 년의 신학활동에 일관되게 흐르는 그의 사상은 칼뱅주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적 정통신학이다.
12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은 이런 그의 처지를 옹호하는 한편,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인 신학사상을 반박하여 성경의 무오성(無誤性)과 문자적 영감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신학난제선평(神學難題選評)』과 『교의신학(敎義神學)』이 그의 주요저술로 손꼽힌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보수신학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처지를 달리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교단 내부에 많은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