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거부운동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주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신앙수호를 위한 항일운동이다. 일제는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와 사상통일을 위한 신사참배를 식민지에도 강요하여 식민지의 민족혼까지 말살하려 했다. 1930년대에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기독교계는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과 더불어 신사참배 거부권유 운동을 전개하여 맞서 싸웠다. 이 투쟁으로 투옥된 이가 2,000여 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신사는 일본의 고유 민간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국민 통합을 위해 각지에 신사를 건립하고 이 신도를 보호ㆍ육성해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하였다. 그리하여 ‘천황’ 및 ‘천황의 선조’를 신사에 모시고 살아 있는 ‘천황’도 신격화해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사ㆍ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사는 1910년 한국병탄전에는 일본 거류민들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건립과 유지를 주도했지만, 병탄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관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나아가 문화침략 내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까지 신사참배와 신사신앙을 강요하였다.
1910년대에는 관공립학교에서, 1920년대 초반부터는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사립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강제로 신사에 참배시키는 정책 시행은 일단 보류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총독부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신사에 참배하든가 폐교하게 하는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의 의견이 분열되어, 19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의 일부는 폐교하고 일부는 순응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 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에서의 신사참배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어가자, 일반인들은 물론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본 경찰은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반신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해 개교회(個敎會)로부터 시작해 노회ㆍ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기독교계도 이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회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고비로 굴복하였다.
이 시기의 신사참배와 부일협력문제를 둘러싼 교계의 분열은 광복 후까지 영향을 미쳐 한국 교회의 심각한 교파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 모두가 이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교파건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전국적 규모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에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을 찾아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 내지 경고한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와 제도권 교회의 불법적 결의에 순교를 각오하고 끝까지 저항해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 ‘신사참배 거부권유운동’이다.
1932년 초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1934년 장로회 총회는 총회장 이인식(李仁植)목사의 이름으로 총독에게 2차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이듬해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 이후 일제는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토의마저도 금지시켜 이러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평안남도의 박관준(朴寬俊)장로는 1936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구금 취조를 당했다. 이러한 청원과 경고가 효력이 없자, 신사참배 거부로 교사직을 사직하고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1939년 2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정계요인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 저지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종교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74회 일본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의 국교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단상을 향해 투척하였다. 이 일로 박관준장로는 6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45년 3월에 순교했으며, 안이숙은 광복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3ㆍ1운동 당시 총회장으로서 이 운동에 참가해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 김선두(金善斗)목사도 일본유학생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신사참배강요금지를 일본 정계요로에 진정하고자 1938년 8월에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였다. 이에 동조하는 일본 정계요인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건너와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지시에 의한 장로회총회의 강제 신사참배 결의를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경찰에 탄로나 김선두목사는 사전에 구속되었고 총회도 삼엄한 경찰의 압력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하고 말았다.
이러한 청원운동은 일제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고, 청원자측이 일제의 권력구조 내지 식민통치 체제를 인정한 체제 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지만, 이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항해 문제를 확산, 폭로하고 불의를 담대히 경고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는 운동이었다.
1938년 이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ㆍ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 이를 결의, 실행하는 제도권 교회를 모두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운동을 폈다. 중심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ㆍ이주원(李朱元)ㆍ 주남선(朱南善),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 함경남도의 이계실(李桂實) 등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다. 만주 지역에서도 박의흠(朴義欽)ㆍ김형락(金瀅樂)ㆍ김윤섭(金允燮)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순회활동을 통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운동방침에 관한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기도 하였다. 1940년 3월경의 안동회합에서는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세속화되어 신사참배를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신사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신앙 동지들을 확보해 신령한 교회 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등을 협의ㆍ결정하고, 각 지역에서 이러한 운동을 확산시켰다.
일제는 이들을 여러 차례 검속 탄압하다가, 1940년 6월경부터 9월에 걸쳐 본격적인 검거에 착수하고 재판에 회부해 광복되기까지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1940년에 나온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이나 같은 해 9월 20일 새벽을 기해 전국에 걸쳐 실시된 ‘조선기독교 불온분자 일제검거령’은 바로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과정에서 조용학(趙鎔學)ㆍ주기철ㆍ 최봉석(崔鳳奭)ㆍ 최상림(崔尙林)ㆍ김윤섭ㆍ박의흠ㆍ권원호(權元浩)ㆍ김련(金鍊)ㆍ 최태현(崔泰鉉) 등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ㆍ집단적 신사참배거부운동과는 달리 보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은 전국 어디서나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전라남도의 황두연(黃斗淵)ㆍ 양용근(梁龍根) 등과 전라북도의 배은희(裵恩希)ㆍ김가전(金嘉全), 충청남도의 정태희(鄭泰熙), 충청북도의 허성도(許聖道)ㆍ송용희(宋用熙), 경상남도의 조용학(趙鎔學), 황해도의 이종근(李鍾根)ㆍ박경구(朴敬求) 등이 있었다. 교파적으로도 장로교는 물론, 감리교의 이영한(李榮漢)ㆍ강종근(姜鍾根)ㆍ권원호, 성결교의 박봉진(朴鳳鎭)ㆍ김연, 동아기독교의 전치규(田穉珪)ㆍ김영관(金榮官), 안식교의 최태현 등이 있다. 일부 천주교 신자들도 교황청의 신사참배 허용지시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따라 참배를 거부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000여 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사참배 내지 신사에 대한 거부감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일제의 강요에 마지못해 참배하거나,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하기까지 했으나, 이에 대한 민족적 반감은 깊었다. 각 가정에 모시도록 행정기관이 나누어준 ‘진구타이마(神宮 大麻 : 가미다나에 넣어 두는 일종의 신주 내지 부적)’도 바로 폐기하거나 형식적으로 벽에 밥풀ㆍ압핀 등으로 붙여두는 경우가 많았다.
1944년 가을 일제의 어용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충청남도 지역 농가를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한 결과, 주민들은 대부분 ‘왜놈의 귀신’, ‘일본의 귀신’이라 하여 이를 별도로 취급하거나, 방치 또는 폐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감때문에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마자 대부분의 신사들은 민간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이들 신사는 대부분 8월 15ㆍ16일에 방화ㆍ파괴되었으며, 광복 후 8일 만에 136건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 일본인의 철수와 함께 신궁ㆍ신사는 이 땅에서 모두 사라지고, 그 터는 대부분 공원이나 학교ㆍ교회 등 공공장소로 이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으며, 당시 일제의 억압과 회유에 굴복해 변질된 제도권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면서 맞서 투쟁했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 정책’ 내지 민족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의의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를 모두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ㆍ보안법ㆍ불경죄 등을 적용해 탄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