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4,150㎡.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에 세워서 중국의 사절(使節)들을 머물게 하였던 곳이다.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 義州路 또는 燕行路)에는 이와 같은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오기 하루 앞서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날에 예의를 갖추어 입성하는 것이 정례(定例)였다.
조선 초기에는 제릉(齊陵:태조비 神懿王后의 陵)에 국왕이 친히 제사지내러 가는 길에 국왕이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벽제관터는 1625년(인조 3)에 고양군의 청사를 옮기면서 아울러 지은 객관(客館)의 터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일부가 헐렸고, 6 · 25동란 때 모두 불탔다. 다만 객관의 문만이 1960년 무렵까지 남아 있다가 무너져버렸고, 지금은 관사의 윤곽과 터만 남아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사와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곳으로도 유명한 사적지이며, 국왕이 사신을 친히 전송하던 모화관(慕華館)과 더불어 한중외교사(韓中外交史)의 현장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