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백흥암은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그 뒤의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1546년(명종 1)에 인종의 태실(胎室)을 팔공산(八公山)에 모시면서 백흥암을 수호사찰(守護寺刹)로 삼아 크게 고쳐 지었으며, 1797년(정조 21)에도 거듭 수리하였다. 극락전은 1546년에 절을 고쳐 지을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랭이질한 주춧돌 위에는 둥근 두리 기둥을 세웠는데, 특히 안쏠림을 준 귀퉁이의 귀기둥에는 가운데기둥보다 조금 높게 꾸민 귀솟음을 두었다. 가구(架構)는 기둥 뿐만 아니라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갖춘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栱包)를 올린 다포(多包)계 양식이다. 공포는 안쪽과 바깥쪽 모두 3출목(三出目)으로, 7포작(包作) 구성을 갖추었는데, 기둥 머리인 주두(柱頭) 위에 초새김한 첨차인 두공(頭工)을 두고서 촘촘히 짜올렸다. 첨차(檐遮)는 물론 첨차와 살미를 촘촘히 짠 제공(諸貢)의 끝부분은 구름무늬를 둔 운두(雲頭)로 이루어졌다. 운두는 2등분되어 윗면은 직각으로 자른 모습이고 아랫면은 둥글게 굴린 모습이어서 고식(古式)으로 보인다. 첨차의 길이는 짧지만 운두는 높아서 공포의 높이가 훤칠한 편인데,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놓인 공간포(空間包)는 앞면에 2조, 옆면에는 1조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층단을 나누어서 가는 테두리를 두른 소란(小欄)반자로 꾸몄다.
이 건물에는 각 부재의 양쪽 끝부분에 단청을 칠하고, 그 사이에는 여러 가지 비단 무늬를 그린 금단청(錦丹靑)을 입혔는데, 이것은 벽화와 함께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건물 안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미단은 특출난 것으로 주목되어 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