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자기가 언제부터 어떤 용도로 처음 쓰이기 시작하였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다니거나 보관하여 둘 때, 물건을 보다 안전하고 간편하게 간수하고자 하는 필요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이 우리의 습속이나 생활양식·의식에 맞게 발달하면서 점차 다양한 용도와 기교를 구사하게 되고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보자기로 알려진 것은 전주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수보로 그 제작연대는 고려말로 추정된다.
이 보자기는 경전보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보자기에 얽힌 사화(史話)를 기록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408년(태종 8) 전사재감 이진(李震)이 입경할 때 그의 종이 황색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사헌부 하리 김을지(金乙持)가 그것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이에 사윤 김조(金稠)까지 이진에게 가담하였으나 둘 다 김을지에게 봉변만 당하고 말았다. 당시 황색은 중국 황제의 전용 색이라 하여 사용이 금지되었기에 이진과 김조는 영을 어겼다 하여 각각 평주(平州)와 수원으로 부처(付處)되었고, 김을지는 조관을 모욕하였다 하여 형장(刑杖)을 맞고 쫓겨났다.
이와 같이 보자기의 색상을 규제한 사례는 또 찾아볼 수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서인(庶人)이 홍염의·홍염복(紅染袱)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영이 내려졌다. 1752년(영조 28)에 간행된 ≪상방정례 尙方定例≫는 보자기 관계의 귀중한 문헌으로 꼽힌다.
이것은 왕실 일가의 의대·일용품·의물 등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던 상의원에서 펴낸 책으로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보자기에 관한 소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82년(고종 19)에 간행된 ≪궁중발기≫는 당시 동궁이었던 순종의 혼례시에 사용한 물품에 관한 기록으로 그 가운데 보자기에 관련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보자기의 용도는 매우 넓으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① 상용보(常用褓) : 전대보(纏帶褓)·보부상보(褓負商褓)·상보·이불보·빨래보·버선본보·받침보·덮개보·책보·횃대보·채찍보·간찰보(簡札褓)·서답보·경대보·함보(函褓)·반짇고리보·목판보 등이 있다.
② 혼례용보 : 함보·기러기보·사주단자보·예단보·연길보(涓吉褓)·폐백보 등이 있다. ③ 불교의식용보 : 마지보(摩旨褓)·공양보·경전보 등이 있다. ④ 특수용보 : 명정보(銘旌褓)·영정봉안보(影幀奉安褓)·기우제보·보쌈보·제기보 등이 있다. 또한 보자기는 사용 계층·구조·색상·재료·문양 등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① 사용계층에 따라 : 민보(民褓)·궁보(宮褓), ② 구조에 따라 : 안감을 대지 않은 홑겹의 홑보, 안감과 겉감 두 겹으로 된 겹보, 솜을 두어 만든 솜보, 조각천들을 이어서 만든 조각보, 일부 혹은 전체를 기름종이로 만든 식지보, 누벼서 만든 누비보 등, ③ 색상에 따라 : 청보·홍보·청홍보·오색보·연두보·아청보 등, ④ 재료에 따라 : 사보(紗褓)·명주보·항라보·모시보 등, ⑤ 문양에 따라 : 화문보(花紋褓)·수목문보(樹木紋褓)·용문보(龍紋褓)·운문보(雲紋褓) 등.
보자기가 우리 나라에서 발달하게 된 주된 원인은 주거공간의 협소를 들 수 있다. 보자기는 개폐에 따라 용적의 신축이 자유로워 공간 협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생활도구라 하겠다.
특히 조각보의 경우, 그 구성의 세련미와 현대성으로 인하여 근래에 주목받고 있는데, 그것이 만들어진 계기는 폐품활용에 있었다. 이렇게 매우 다양한 종류의 보자기가 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보편화된 것은 민간신앙적인 면도 있었다.
즉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어 ‘복(袱)’은 ‘복(福)’과 뜻이 통하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보자기에 싸두는 내용물을 복에 비유하여 복을 싸두면 복이 간직된다는 속신이 보자기의 발달을 더욱 부채질한 것이다.
혼례시 예물을 싸던 보자기는 이러한 의미를 내포한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혼례용보로 주로 쓰였던 관동지방의 수보는 보자기에 투사된 이러한 복락기원적(福樂祈願的)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수보의 가장 대표적인 문양은 나무이다. 나무는 우리 나라에서 특별히 신성시된 자연물 중의 하나로 상서롭고 영험이 있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이것이 길사에 쓰이는 수보에 이용된 것은 복락 기원과 관계가 깊다고 하겠다. 꽃·열매·원앙 등의 길조 문양도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였으며 특히 석류 문양은 다산·다남의 전형적인 상징이었다.
수보에 주로 쓰인 색상인 청·적·황·백·흑은 음양오행설에서 말하는 자연계의 기본 색상인 오색에 해당하는 것이다. 수보의 오색 사용은 음양의 조화로서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꾀한 민간신앙적 배려와 관계가 깊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보자기는 예전에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었다. 따라서 혼수물목에는 출가하는 딸을 위하여 정성으로 마련한 수십 개의 보자기가 있었다고 한다.
패물을 간직하고 버선본을 보관하며, 함을 받치고 밥상을 덮고 이불을 싸고 빨랫감을 싸는 등 일상의 모든 일에 소용되었으므로 혼인을 앞둔 딸을 위하여 한 땀 한 땀의 정성을 모아 혼수품으로 장만해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계급의 상하 구별 없이 널리 쓰이던, 생활 속의 친숙한 도구였던 보자기는 근대화의 진행에 따라 넓었던 그 사용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 있으며 자작하던 전통도 점차 잃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