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 ()

흉배
흉배
의생활
개념
옷감 · 헝겊 · 가죽 등의 바탕에 여러 가지 색실로 무늬를 수놓아 장식하는 공예미술.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자수는 옷감·헝겊·가죽 등의 바탕에 여러 가지 색실로 무늬를 수놓아 장식하는 공예미술이다. 문명의 발달로 옷감이 만들어지고 금속 바늘이 출현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자수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시대의 변천을 겪으며 조형예술로 발전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옷은 물론 가마나 말안장, 일상용품까지 자수로 장식하였다. 조선 시대의 자수는 실물 중심으로 병풍, 복식, 생활, 불교 자수로 분류된다. 자수의 기법으로는 자릿수, 자련수, 이음수, 징검수, 매듭수 등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자수에 표현된 주된 관념은 현세의 복락을 기구하는 것이다.

정의
옷감 · 헝겊 · 가죽 등의 바탕에 여러 가지 색실로 무늬를 수놓아 장식하는 공예미술.
개설

자수는 인류가 동물의 모피나 식물의 껍질과 잎 등을 원시적 재봉용구로 꿰매고 엮어 옷을 지어 입었던 선사시대에 기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고기나 짐승의 뼈 등으로 만든 바늘로 짐승의 가죽을 꿰매어 옷을 해입는 등의 원시단계에서 점차 문명이 발달되어 옷감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금속바늘이 출현하면서 자수가 시작되었다.

즉, 인류생활이 점차 문명화되면서 옷이나 직물제품에 계급 표시 등을 목적으로 장식 또는 자수를 도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수는 직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조형예술로 발전되고, 각 민족의 생활환경 · 풍습 · 신앙 등에 따라 독자적 양식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수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우리 민족의 미적 특질을 표현해왔다. 자수는 길쌈 · 바느질 등과 함께 바늘 한땀한땀의 정성을 통해 일상생활 곳곳에 섬세한 솜씨로 아름다움을 가꾸워왔으며, 아울러 민족의 정서를 그 속에서 꽃피웠다.

역사

선사시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흙이나 돌로 만든 방추차(紡錘車)와 크고 작은 뼈바늘 · 돌바늘 그리고 바늘집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적용구와 재봉용구가 출토됨으로써 그 당시에 이미 직조와 바느질을 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뒤이어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철로 만든 농기구가 등장하여 농업이 현저하게 발달되었다. 이에 섬유재배기술이 발전되고 직물생산이 증대되었다.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 등을 보면, 이 무렵의 우리나라에서는 마(麻)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고치를 길러 면포(綿布)를 비롯하여 마포(麻布), 그리고 합사(合絲)하여 짠 교직물(交織物)인 겸포(縑布)도 생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직물의 발달은 자수발달의 기본요건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인은 외국에 나갈 때에 증(繒) · 수(繡) · 금(錦) · 계(罽)로 지은 옷을 즐겨 입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수는 금은색사(金銀色絲)로 수놓은 비단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자수는 훼손되기 쉬운 재료의 성질 때문에 이 시대의 유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어 그 실상을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지배층의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표시로 옷이나 깃발, 수레 등에 자수로 장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이 시대에는 생산도구와 생산기술이 전반적으로 발달되어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이에 방직기계도 개량되고 직조술도 발전되어 직물의 종류가 증가되고 품질도 좋아졌다. 따라서, 옷이나 각종 직물제품에 자수장식도 성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수에 관한 문헌이 희소하고 자수유물도 아직 발견된 예가 없어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1973년에 발굴된 경주 천마총(天馬塚)의 출토 유물 중에서 옷자락에 금사(金絲)로 수놓은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신라 진덕여왕이 650년(진덕여왕 4)에 손수 비단[錦]을 짜서 여기에 오언(五言) 「태평송(太平頌)」을 수놓아 당나라 고종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친당외교 선물로 제작된 「태평송」자수는 5언 20행으로 도합 100여 자의 한자가 수놓인 대작이다. 그 내용은 고종의 치적을 칭송하는 의례적인 것이었다.

「태평송」의 수가 시사해주는 바는 첫째로 일찍부터 자수품이 국가간의 친분을 표시하는 외교상의 증여품으로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둘째로 여왕이 손수 비단을 짜서 수를 놓았다는 기록은 당시 귀족에서 일반평민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어릴 때부터 습득해야 하는 가사기술로서 바느질 · 길쌈 · 염색 등과 함께 자수를 중요시했다는 사실이다.

자수는 이 시대에 발달된 각종 문물과 함께 일본에 전해져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사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일본자수교과서 자수연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340년경에 백제의 왕이 옷을 짓는 여공인 진모진(眞毛津)을 일본으로 보냈는데, 그가 일본 자수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 고구려의 가서일(加西溢)이 만들었다는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 일본 국보, 奈良 中宮寺 소장)은 고구려풍의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인동문(忍冬文)연화문(蓮花文)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장(意匠) 요소와 같은 점이 많아 고구려와 백제의 자수기법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이 시대에는 삼국의 문화적 특징이 융합되고 집성되어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를 누렸다. 자수 역시 크게 발달된 것으로 보이나 작품을 통한 연구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다만 『삼국사기』 잡지(雜志)를 보면, 옷은 물론 가마나 말안장,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자수로 장식되었고, 불교자수도 상당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자수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보면 먼저 834년(흥덕왕 9년)에 복식금령(服飾禁令)이 내려져 골품(骨品)에 따른 직물사용의 종류를 규정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 고위신분인 진골녀(眞骨女)의 경우 겉옷[表衣]과 속옷[內衣] · 바지[袴] · 버선 · 신발 등에 계(罽)와 수놓은 비단[繡錦]을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하였다.

이같은 금령이 시행된 것으로 보아 당시 귀족사회에 팽배해 있던 사치성에 의해 고급직물과 자수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옷감 외에도 안장언치[鞍韉]와 안장자리[鞍坐子] 및 발[簾]에도 ‘수놓은 비단’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특히 진골과 육두품은 자수병풍의 사용을 금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악(祭祀樂)에 보면, “807년(애장왕 8)에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할 때 무척(舞尺) 4명은 푸른색 옷, 금척(琴尺) 1명은 붉은색 옷, 가척(歌尺) 5명은 채색옷을 입었는데, 이들은 수(繡)부채를 들고 금루대(金縷帶)를 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의 복식 및 생활자수가 귀족사회에 보편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일어나 많은 귀족들이 다투어 절에 토지를 비롯하여 불상(佛像) · 불구(佛具) 등을 시주하였다. 이같은 물자낭비를 막기 위해 애장왕은 새로 절 짓는 것을 금하고 수리만을 허용하였다. 또, ‘금수(錦繡)’로 불사(佛事)하는 일도 금하였다. 이는 법당의 장식에까지 고급비단과 자수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수초상(繡肖像)’에 관한 기록이 있다. 즉, 886년에 헌강왕이 죽자 그의 비 권씨(權氏)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왕을 추모하여 왕의 초상을 수놓아 불국사 광학장 강실 벽면에 안치하였다. 같은 해 정강왕이 즉위하자 그의 비 김씨(金氏)는 돌아가신 부모를 추모하여 석가상(釋迦像)을 수놓은 번(幡) 1정(幀)을 같은 강실에 헌정하였다.

두 작품은 당시 그림과 자수로 가장 유명했던 비구니 원해(圓海)의 솜씨라고 한다. 당대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은 이 석가상에 대해 “……천에 물들여 바느질하니 마치 아지랑이가 끼듯 슬기어린 구름이 나부끼듯 허공에 높이 걸려 빛나는 공덕을 더욱 화창하게 드러내도다.”라고 찬하였다.

중국에서는 역사상 걸출한 자수작가의 이름이 『열녀전(烈女傳)』에 올라, 그들의 이름이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사서에는 거의 언급된 바 없다. 원해는 옛 문헌에 나와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자수작가이다. 1172년 고려의 명종이 광학장에 들러 헌강왕의 수초상(繡肖像)에 예를 올린 사실로 보아 원해의 작품은 오랫동안 보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에 길쌈과 염색, 바느질 등의 일을 전담하던 여러 공방(工房)이 있어 직물공예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수와 관련되어 있는 공방을 보면 〈표 1〉과 같다.

工房 담당 기술
錦典 錦을 직조
毛典 毛를 직조
麻典 麻를 직조
綺典 綺를 직조
朝霞房 朝霞錦 등의 비단을 직조
紅典 염료 제조와 염색
蘇芳典 염료 제조와 염색
〈표 1〉 신라시대의 자수관계 공방

먼저 금전(錦典) · 모전(毛典) · 마전(麻典) · 기전(綺典) 등은 각 해당 직물을 짜던 곳인 듯하다. 조하방(朝霞房)은 조하금(朝霞錦) 등의 비단을 짜던 곳으로 보인다. 이 비단은 당나라에 수출하였다.

그리고 홍전(紅典)과 소방전(蘇芳典)과 같은 염료를 제조하고 염색을 맡은 기구를 둔 것으로 보아 염색법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듯하다. 이러한 염색법의 발달은 자수의 기본재료인 직물과 실에 다양하고 미묘한 색상을 연출할 수 있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

실물을 통한 고려자수 전반에 걸친 고찰은 어려운 형편이다. 고려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수사계분경도」(보물, 1979년 지정)와 「기호산신도(騎虎山神圖)」 및 기타 몇몇 박물관과 절에 소장된 소수의 작품이 전해온다.

따라서, 『고려도경(高麗圖經)』『고려사』 등의 문헌의 곳곳에서 보이는 자수관계의 기록에 의해 추론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고려시대의 자수양식을 편의상 복식자수(服飾刺繡) · 기용자수(器用刺繡) · 감상자수(鑑賞刺繡) · 불교자수로 나누어 개관해본다.

① 복식자수 : 귀족층의 복식 사치가 심하여 당국에서는 이같은 사치풍조를 없애기 위해 자주 금제조처를 취하였다. 1034년(덕종 3)에는 “모든 신하는 아내가 금봉(金鳳)비녀를 머리에 꽂지 못하게 하고, 수놓은 비단은 찢어버리고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는 금령을 내린 바 있다.

10년 후인 1043년(정종 9)에는 경외(京外)의 남녀 백성이 용봉(龍鳳)문양을 비단에 수놓거나 금박장식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1144년(인종 22)에는 사치가 심하여 내외(內外) 공사(公私)의 옷에는 반드시 금수(錦繡)를 사용하고 그릇에는 옥(鈺)을 사용하므로 이를 근절시키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같은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당시의 복식자수가 섬세하고 세련됨이 지나쳐 사치한 귀족취향의 장식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도경』 왕복조(王服條)에 보면 “고려 왕은 상복(常服)을 입을 적에는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소매가 좁은 엷은 황색의 포(袍)를 입고 자주색 나(羅)로 만든 넓은 허리띠를 두른다. 허리띠 사이사이에는 금사(金紗)와 벽사(碧紗)로 수를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와 귀부인은 그림 또는 자수 문양으로 장식한 붉은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또한, 왕을 호위하는 친위군은 대개 오색의 꽃이나 새 문양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었고, 허리띠에 오색의 꽃을 수놓아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군복에까지 자수가 장식된 점으로 미루어 귀족이나 일반평민의 복식에도 자수장식이 성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② 기용자수 : 『고려도경』에 보면, 자수장식을 한 각종 궁중 의물(儀物)과 기명(器皿)이 〈표 2〉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름 개수 재료 및 꾸밈새 문양 용도
盤螭扇 2 붉은 비단, 붉은 자루, 金色 비단 왕이 행차할 때 바람막이로 사용
雙螭扇 4 붉은 비단, 붉은 자루, 金色 비단 禮를 행할 때 사용
繡花扇 2 붉은 비단, 붉은 자루, 金色 비단 모란 예를 행할 때 扇 다음에 벌려 세움.
華 蓋 1 문양비단, 오색 비단, 방울, 流蘇, 그림과 자수를 섞어 꾸몄음. 日傘의 일종으로 大禮 때 대궐 밖에 세움.
黃幡 문양 비단, 流蘇 瑞雲 大禮 때 황개와 나란히 세움.
采輿 1 오색무늬 비단, 금수를 섞어 맺었음. 채여는 셋이 있는데 각기 詔書·御書·大金香毬를 봉안함. 도금한 향구로 渾天儀와 같음.
王馬 3 금, 옥 장식, 붉은 비단 안장 위에 수놓은 휘장을 씌움, 수놓은 방석 八關齋와 같은 조서를 받는 예식에 사용
使節馬 수놓은 안장 외국 사절용
繡幕 붉은 무늬 비단 원앙새, 난새, 꽃 公會에 설치
燕臺 붉은 칠, 금칠한 장식못, 수놓은 휘장을 둘렀음. 좌석 앞에 놓는 床, 사절 접대용
繡枕 흰 모시자루, 자리 속을 향초로 채웠음. 사절 접대용
〈표 2〉 고려도경에 나타난 기용자수

③ 감상자수 : 고려자수에서 주목할 사항은 미적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감상자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고려도경』 공장조(供張條)에 보이는 ‘수도(繡圖)’가 바로 감상자수이다.

그 설명을 보면 “붉은색 바탕에 초록색으로 테를 둘렀고, 오색사(五色絲)로 산화(山花) · 희수(戱獸)를 수놓았는데 그 정교함이 수막(繡幕)을 능가한다. 화죽(花竹) · 영모(翎毛) · 과실 따위도 수놓았는데 각기 생기가 있다. 고려의 습속에는 장막을 10여 폭 칠 때마다 수도 하나씩 걸어 사이를 띄운다.”라고 하였다.

그 수요 범위가 넓어서 장막뿐만 아니라 내방(內房)이나 거실 등의 실내에도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자수미(刺繡美)의 완상을 목적으로 한 감상자수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자수의 영역이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④ 불교자수 : 불교는 전시대에 이어 국가와 왕실의 흥륭을 꾀하는 호국신앙으로 육성되었고 여성의 생활에도 깊이 스며들어 생활습속화되었다. 이에 어느 시대보다도 각종 용도의 불사용(佛事用) 자수가 번성하였다.

당시 상당수의 화승(畵僧)이 불사용 그림에 참여했던 점을 감안할 때, 불교자수에 전념하던 승려와 비구니 및 여신도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일본 등지에 남아 있는 고려 불화의 양과 질로 미루어 불교자수도 이에 비견됨에는 틀림없다. 다만 현존작품이 거의 없어 앞으로의 발굴을 기대하고 있다.

조선시대

건국 초기에서 15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정치 · 경제 · 사회 등의 각 방면에 걸쳐 일대변혁이 이루어져 조선문화의 잠재력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는 중농주의와 상공업 억제를 기본정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민간수공업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농민층은 식량생산을 주업으로 하였고, 수공업은 부업으로 삼게 되어 의료(衣料)의 생산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의료생산에 관계된 직조 · 염색 등의 직물공예는 주로 여성이 담당하고, 여공(女工)을 적극 권장하여 생산의욕을 높이고 일반여성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임을 강조하였다.

조선 초기에 자수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먼저 흉배제도(胸背制度)의 제정과 관청수공업의 정비를 알 수 있다. 문무관원의 품계의 표장(表章)인 흉배는 1453년(단종 1)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으며, 현재 전해오는 흉배는 대부분 후기에 제작된 것들로 그 수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흉배는 일종의 공용자수로서, 이 시대의 자수변천사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관청수공업조직은 삼국시대부터 발달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인 15세기 무렵에 가장 발달하였다. 여기에 동원된 장인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배속되어 담당기술분야에 종사하였다. 장인조직 중 자수와 관계깊은 중앙공장의 예를 보면 〈표 3〉과 같다. 이들 장인층의 전담 생산물이 왕족과 고급관리층에 소용되었던 옷가지와 기타 직물제품 및 자수장식에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工房 담당 기술
綾羅匠 능라를 직조함.
紡織匠 포직물을 직조함.
合絲匠 실을 합아여 굵은 실을 드림.
金絲匠 금사를 만듬.
裁金匠 실을 곱게 다듬음.
花兒匠 옷에 金絲로 수놓음.
針 匠 바늘을 제작함.
針線匠 바느질을 담당함.
〈표 3〉 조선시대의 자수관계 장인조직

이같은 공장조직(工匠組織)과는 별도로 궁내에는 왕족일가의 복식 및 기타 용품의 자수장식을 전담하던 ‘수방(繡房)’ 조직이 있었다. 이곳에는 10세 전후에 입궁하여 소정의 교육과 기술을 습득한 여성이 적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궁내수요의 자수품 제작에만 종사하였다.

이처럼 여러 공장조직과 수방이 상호 연관되어 궁중자수, 즉 ‘궁수(宮繡)’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 결과, 궁수는 한말까지 그 전통이 지속되었고 규범화된 양식과 고도의 기능에 의해 자수품이 제작되었으므로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기법이 정교하고 치밀하다.

이같은 궁수에 대비되는 것이 민간이 제작한 자수, 즉 ‘민수(民繡)’이다. 이처럼 궁수와 민수의 이중구조는 비단 조선시대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며, 사회계층이 분화된 이래 지속되어온 필연적인 귀결로 생각된다.

민수는 전문화 · 분업화되어 있는 궁수와는 달리 씨족적 · 지방적 가사전통(家事傳統)에 의해 습득된 기능으로 일가(一家)의 여성이 전담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궁중의 정착화된 규범에 따른 궁수에 비해 민수는 자수인 각자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우리나라 전통자수의 독특한 개성미는 민수에서 창출된 바가 적지 않다.

조선 초 · 중기에 걸쳐 제작된 자수품은 그 실물이 희소하여 당시의 자수양식을 체계화하기에는 어려운 형편이다. 이것은 오래 보존하기 어려운 직물제품의 재료적 성질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또한 기술노동력을 천시하던 유교적 체제에도 그 원인의 일단이 있다.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침시에 입은 각종 국가유산의 손실은 막대한데 여기에 많은 자수 유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나베시마(鍋島直茂)라는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자수장(刺繡匠)을 본국으로 보내어 도요토미(豊信秀吉)에게서 상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는 고려 후기에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한 공부(工賦) 중에 자수기능녀가 포함된 사실과 함께 고려와 조선의 자수가 이웃나라에서 탐낼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두 차례의 국난을 치른 후 점차로 국력이 회복되어 안정을 되찾게 되어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치는 시기에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의 제반분야에서 변혁과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민간수공업과 상업이 번창하게 되어 서민층의 사회 · 경제적인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 결과, 서민의 문화예술활동의 폭이 넓어지고 그 파급효과가 직물공예에도 미쳐 직물제품의 유명산지가 부상되었다. 자수로서는 평안도의 안주와 박천 · 구성 등지와 전라도의 전주가 유명하였다.

이 중에서 안주수(安州繡)는 상품자수로 유명하며 자수제작에 남자수장이 참여하였다. 거래는 주문생산을 위주로 했는데 한때는 중국에까지 공급하였다. 이는 상품자수를 생업으로 삼는 직인층(職人層)이 등장할 정도로 자수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상당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안주 등지가 자수산지로 부상한 이유는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수사(繡絲)가 질과 양에 있어 전국에서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이외의 상품자수 산지로는 전라도의 순창이 베갯모 등의 소품자수로 유명하였다.

이같은 상품자수의 등장은 민수의 발달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19세기 후기에 이르면 자수를 놓을 수 있는 직물제품은 어느 것에나 자수문양을 장식할 정도로 크게 번창하였다.

이는 현존하는 자수품의 종류에서 확인된다. 베갯모 · 수저집 · 바늘집 · 골무 등의 소품에서 병풍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각양각색이며 표현양식도 다채롭다. 한편, 궁수도 꾸준히 성장하여 이 시기에 기량이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짐작된다. 「길상도(吉祥圖)」 · 「어락도(魚樂圖)」 등은 이같은 궁수의 진면목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자수양식을 실물 중심으로 병풍 · 복식 · 생활 · 불교자수로 분류하여 살펴본다.

① 병풍자수 : 작품의 규모와 수준으로 보아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자수이다. 병풍의 용도는 시간적으로는 사람이 평생 치러야 하는 주요 행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돌 · 생일 · 혼인 · 회갑잔치를 비롯하여 각종 축하연 및 상사와 제사에 걸쳐 두루 이용되었다.

공간적으로는 안방과 거실 및 서재 등의 실내는 물론 궁궐을 비롯한 역사 · 객관 · 서원 등의 내부공간과 사찰 · 신당 등의 신앙장소에도 두루 비치되었다. 이렇듯 병풍은 시간적 · 공간적으로 개인 · 집단 · 공공에 연계되어 있다.

자수병풍은 이러한 범주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유형을 보면 화조(花鳥)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십장생(十長生)과 수복(壽福)류이다. 화조는 모란 · 국화 · 연꽃 · 매화 · 오동나무 등과 한 쌍의 · 원앙 · 봉황 · 오리 등이 함께 묘사되어 단란한 가족생활을 상징하고 있다.

십장생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오래 산다는 열 가지의 자연물상(해 · 구름 · 산 · 물 · 소나무 · 대나무 · 학 · 사슴 · 거북 · 불로초)을 장수(長壽)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같은 길상관념을 표현한 주제로는 「백동자도(百童子圖)」 · 「종정도(鐘鼎圖)」 · 「곽분양향락도(郭汾陽享樂圖)」 · 「수복문자도(壽福文字圖)」 · 「백수전도(百壽全圖)」 등이 있다.

다음에 교화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는 농사가 나라의 대본(大本)임을 일깨워주는 「경직도(耕織圖)」가 있다. 유교의 실천도덕률을 알기 쉽게 도시한 「효제도(孝悌圖)」 및 불교적 허무관을 제시한 「구운몽도(九雲夢圖)」 등도 있다.

교화적 주제는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점차 본래의 의도가 퇴색하고 그림이나 자수의 표현주제로 양식이 고착되었다. 그러기에 교화적 의미보다는 작품의 조형적 아름다움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길상’이나 ‘교화’ 같은 상징적 주제를 띠지 않고 단순한 장식용 또는 특수한 제작동기에 의한 것으로는 「책가도(冊架圖)」와 「만민송덕병(萬民頌德屛)」이 있다. 「책가도」는 각종 문방구와 기명을 정연한 기하학적 구도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양식은 전통자수에서 보이는 유일한 예라 할 수 있다. 「만민송덕병」 · 「만인산(萬人傘)」 · 「만인수첩(萬人携帖)」 등은 지방 관장이 퇴임할 때 지방유지들이 추렴하여 기념선물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자수병풍의 꾸밈새는 그림병풍과 마찬가지로 8폭이 가장 많고 12폭 · 10폭 · 4폭 · 2폭 등의 순이다. 예외적으로 「만인송덕병」처럼 20폭짜리도 있다.

② 복식자수 : 옷과 장신구에 장식한 자수문양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미분화되어 있었다. 왕족을 포함한 상류층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일반평민은 재래의 전통을 고수하였다. 궁중복식은 높은 신분과 위의를 나타내기 위해 금박이나 색사로 장엄을 다하는 것이 상례였다.

자수형식에는 옷의 표면에 직접 수놓은 것과 자수장식물을 표면에 부착한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국왕의 대례복(大禮服)과 왕족일가의 각종 예복이 해당된다. 후자에는 흉배를 비롯하여 보(補) · 후수(後綬) 및 기타 복식장식물이 포함된다. 궁중여성의 예복인 활옷 등에는 모란 · 국화 · 불로초 등의 꽃무늬와 각종 길상문자와 장생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이와는 달리 왕족 남성이나 관리는 옷 표면에 자수장식을 하지 않고 상복(常服)의 가슴과 등에 학이나 호랑이무늬를 수놓은 흉배를 부착하였다. 왕과 비빈(妃嬪)이 착장하던 표장은 흉배와 구별하여 보(補)라고 일컫고 용이나 봉황을 수놓았다. 현존하는 흉배의 실물은 대개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인데, 제작시기가 비교적 오래된 것은 규격이 크고 은은한 색조의 꼰실로 치밀하게 수놓아져 있다.

이에 비해 후대의 것들은 대체로 규격이 작고 원색실을 사용해서 촌스러운 느낌을 준다. 흉배와 같은 표장의 일종인 후수는 관리의 제복과 조복(朝服)의 허리 뒤에 매달아 늘어뜨린 장식물로 품계에 따라 문양과 장식이 달랐다.

민간의 복식자수로는 혼례복인 활옷이 다수 전하고 있고, 이 밖에 어린이용의 굴레 · 쾌자(快子) · 조끼 · 허리띠 등이 있다. 어린이용의 복식자수는 동심에 어울리게 색상과 문양이 천진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옷가지 외의 장신구에는 노리개와 주머니가 있는데, 특히 노리개는 조선시대의 여성이 패용하던 대표적인 장신구이다. 그중 여성들의 솜씨의 결정인 노리개는 노리개 특유의 섬세한 형태미가 불로초 · 당초 · 연잎무늬 등을 공들여 수놓아 여성적인 정취를 더하고 있다.

노리개 못지않게 주머니도 장신구로 애용되었다. 이미 고려시대의 귀부인들은 비단으로 만든 향낭을 패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친견하는 자리에서 신하들이 활쏘기대회를 가졌는데, 우승한 자에게는 상품으로 ‘수주머니’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외국사신에게는 수놓은 ‘약주머니’를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돌이나 회갑잔치 등에 수주머니를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 통례였다.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갈 때에도 시댁 어른들에게 수주머니를 올리는 것이 예절이었다. 주머니는 남성용의 귀주머니와 여성들의 두루주머니로 대별되며, 여성용 주머니는 전체적인 짜임새와 놓여진 수가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③ 생활자수 : 일상생활에 쓰이는 일용품에 장식된 자수를 말한다. 생활자수는 그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직물제품 전반에 걸쳐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베갯모 · 버선본집 · 안경집 · 쌈지 · 수저집 · 붓집 · 방석 · 방장(房帳) · 보(褓) 등이다.

이것들은 대개 꽃무늬와 장생무늬 및 길상문자가 수놓아져 있다. 각기의 표현양식은 자수인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어떤 것은 색상과 문양에 토속미가 짙게 배어 있는가 하면 수면(繡面) 구성이 깔끔하여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 다층화된 생활자수에서 폭넓은 민수의 내용을 알게 된다.

④ 불교자수 : 일반 자수품과는 달리 시주인(施主人)에 관한 명문(銘文)이 기재되어 있고, 또한 간지(干支)가 표시된 것도 있어, 발원내용과 시주인의 이름 및 제작시기를 확인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정성과 기술을 다하여 제작에 임하기 때문에 일반자수품에 비하여 그 기법이 꼼꼼하며 제작시간도 많이 든 격조높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현존하는 불교자수품에는 ‘25조가사(條袈裟)’를 비롯하여 수불(繡佛) · 번기(幡旗) · 불방석(佛方席) · 연수식(輦垂飾) · 다라니(陀羅尼)주머니 등이 있다.

근대 이후 및 현황 전통자수가 활기차게 생동하여 창조적 발전을 기대할 무렵에 거듭되는 내우외환과 정치적 무능으로 인해 급기야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910년 이후 일본 자수문화가 급격히 유입되면서 회화 지향적인 동양자수라는 이름의 자수가 성행하였다. 1945년 이후에는 서구의 자수문화가 도입되었다.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예과(技藝科)가 설치되어 자수교육이 실시되어 매년 60명씩 4회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1945년에는 가사과에 자수교육이 통합되었다.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藝林院) 미술학부 자수과가 창설되어 자수교육이 시작되었다. 1981년 다시 섬유예술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7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약 3개월간에 걸쳐 ‘한국전통자수500년전’이 열린 뒤 전통자수에 대한 재인식과 재현작업이 활발해짐으로써 큰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1976년부터 시작된 전승공예대전에서도 자수분야의 참여가 활발하여 전승의 맥락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한상수(韓尙洙)는 1981년 전승공예대전에 수괘불을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받은 후, 1984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 자수장(刺繡匠)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 개인이 운영하는 박물관 · 자수연구소 · 공방 등이 활발히 운영되어 전통자수를 재현하는 고증과 자수사 연구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구성요소 및 특징

재료

자수의 바탕천은 흰색 또는 청홍 유색(有色)의 비단이 가장 많이 쓰였고, 드물게 모직물 등도 쓰였다. 그리고 수사는 반푼사와 꼰사가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 중기까지는 실올이 가는 꼰사가, 조선 후기 이후에는 굵은 꼰사가 전통자수의 기본재료였다. 꼰사는 강도와 탄력이 있어 쉽게 풀어지거나 훼손되지 않아 오랫동안 원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또한, 규칙적으로 세밀하게 수놓는 데 적합하며 꼬임새가 강하여 실의 광택이 드러나지 않는다. 일정한 빛에 의해서 일정한 굵기로 된 꼰사는 꼬인 올의 수와 빔의 방향(왼쪽 또는 오른쪽)에 따라 표현효과에 차이가 생기나 어떤 경우에도 수면은 굴곡 없이 수놓이게 된다. 이에 비하여 반푼사는 실올이 굵고 거칠어 땀새를 짧게 이어갈 수 없어 규칙적이거나 세밀한 묘사는 어렵고 넓은 면적을 쉽게 메꾸는 데 적합하다.

기법

주요기법으로는 자릿수 · 자련수(刺練繡) · 평수(平繡) · 이음수 · 징검수 · 매듭수 · 사슬수 등이 사용되었다.

① 자릿수 : 우리나라의 전통자수에서만 보이는 독창적인 기법이다. 돗자리의 표면처럼 촘촘하게 엮은 모양으로 수놓는 이 수법은 수면이 치밀하고 고르며 단단하고 짜임새 있게 표현된다. 자릿수는 비교적 제작연대가 오래된 작품과 불교자수에 많이 사용되었다.

② 자련수 : 땀새가 장단으로 교차되게 수놓는 기법으로 색조의 변화와 이전에 의해 문양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편리한 기법으로서, 꽃송이나 나뭇잎의 묘사에 잘 응용된다.

③ 평수 : 수면을 수평 · 수직 · 경사방향에 동일간격의 땀새로 메꾸어가는 기법이다. 수면을 수평하게 조성하고자 할 때 수놓는 방법으로, 비교적 간편한 문양을 표현할 경우에 평수가 많이 사용된다.

④ 이음수 : 사선방향으로 땀새를 이어 선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주로 문양의 테두리선을 표현하는 데 응용된다. 수면을 구획짓거나 또는 하나의 선만으로 형체를 암시하고자 할 때에도 응용된다. 주된 문양의 색상과는 별개의 색실을 사용하여 윤곽을 선명하게 하며, 한계를 분명하게 할 때에 사용되는 기법이기도 하다.

⑤ 징금수 : 수가 놓여진 윗부분을 군데군데 징거 고정시켜 수면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기법이다. 징거 두는 실은 자수실과 동일한 재료의 가는 실을 사용하였다. 조선 중기까지는 동일색의 실을 사용하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수면과는 별개의 색실을 사용하여 이중의 색채효과를 내기도 했다. 금은사(金銀絲)로 수를 놓는 경우 금은사가 굵고 거칠어 그대로 수놓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금 · 은사를 길게 배열하면서 비단실로 군데군데 징거 고정시키게 된다.

⑥ 매듭수 : 매듭수는 각종 꽃의 술이나 석류 등 작은 씨앗을 표현할 때 비교적 굵은 실을 사용하여 매듭진 실밥을 짧게 하여 수면에 밀착되도록 하는 것이 전래되는 기법이다. 조선 중기까지의 수품의 경우는 수면과 동일색조의 색사를 사용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원색조의 강한 색사를 사용하여 꽃술이나 씨앗이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시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⑦ 사슬수 : 사슬고리가 이어진 모양의 표현법으로 고대와 조선 후기에 사용되었던 기법이다. 현전하는 수품 중에는 노리개종류의 이음수 대신 테두리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예시한 각종의 중요 기법과 보조 기법이 적절히 보완, 응용되어 문양을 표현해왔다. 또 하나 우리나라 자수기법에 보이는 특징의 하나는 실을 절약하기 위해 자수품의 표면만 수놓이게 하고, 뒷면은 실밥만 보이도록 하여 실의 양을 반감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러면 수지 밑에는 앞면과는 달리 작은 땀새의 점선모양만 남는다.

여기서 홑수와 경수에 대해 간략히 비교 설명하면, 홑수는 바탕천 위에 그려져 있는 모양대로 단조롭게 수놓는 방법이다. 경수는 수놓기 전에 솜이나 종이 또는 시치미 위에 수를 놓아 양감있게 처리한 후 수놓기 때문에, 홑수는 얇고 평면으로 보이는 반면에 경수는 입체적이고 두텁게 보인다.

공정

재래의 자수공정은 개인이나 그룹을 지어 실을 꼬거나 염색하고, 바탕천을 짜고 밑그림을 준비하여 수놓는 과정까지를 작업공정으로 여겼다. 여기에서는 기성의 재료를 사용하여 직접 수를 놓는 약식공정을 말하고자 한다.

① 원하는 밑그림, 바탕천, 색실을 준비한다. ② 바탕천을 수틀에 고정시킨다. ③ 밑그림을 깨끗하게 그린다. ④ 겹수의 경우 심을 넣을 준비를 한다. ⑤ 수가 끝나면 수틀을 뒤집어놓고 막대로 가볍게 쳐서 먼지를 턴다. ⑥ 수놓는 뒷면에 가볍게 풀칠을 하여 실밥이 흩어지지 않게 한다. ⑦ 그늘에서 말린 다음 수틀에서 뗀다.

밑그림

밑그림은 대화(臺畵) · 하회(下繪) · 수화(繡畵) · 수본(繡本)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밑그림은 묵선(墨線)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밑그림은 궁중에서는 전문화공이 그리고, 민간에서는 자수인 스스로가 직접 그린다. 궁중에서는 전문화공의 수화 외에도 색채화나 판각화가 사용되었다.

특히, 색채 밑그림은 색이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자수인의 배색(配色)의 창의성마저 제한받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단색선의 밑그림을 가지고 자수를 하게 되므로 자수인의 취향과 기량에 의해 자수품은 밑그림과는 달리 새로운 작품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즉, 밑그림은 어디까지나 자수방향을 정하는 지침에 그치고, 자수의 조형미는 공장이의 역량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조사된 전통적인 밑그림 제작방법은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되었다.

① 바탕천 위에 직접 묵선으로 문양을 그리는 경우, ② 판각된 문양을 바탕천 위에 찍는 경우, ③ 투명지에 호분(胡粉)으로 그린 다음 바탕천 위에 찍으면 호분선이 옅게 찍히는데, 그 선을 따라 진하게 묵선으로 밑그림을 완성시켜 사용한 경우, ④ 종이에 원하는 문양을 그린 다음 그것을 오려 바탕천 위에 붙이고 그 종이 위에 수놓는 경우이다.

이상의 방법 중에서 병풍 등 대작에는 ①과 ④의 밑그림이 사용되고 소품류의 경우는 ② · ③ · ④의 방법이 병용된다.

우리나라 전통자수에 표현된 주된 관념은 시대적 변천에 따라 단계적 차이는 있겠지만 큰 줄기는 현세복락(現世福樂)을 기구하는 신앙고백으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옛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기층심리에 자리잡고 있는 현세이익의 생활신앙인 무속에 불교 · 도교 · 유교 등의 외래신앙에서 추출된 기복적 요소가 접합되어 우리나라 자수의 독창적인 사조를 이루어온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지(三國志)』
『규합총서(閨合叢書)』
『조선상식문답』(최남선, 현암사, 1980)
『한국의 민속공예』(맹인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9)
『한국여성사』(이화여자대학교, 1978)
『한국의 자수』(허동화, 삼성출판사, 1978)
『한국장신구미술연구』(황호근, 일지사, 1978)
『불국사』(문화재관리국, 1976)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5)
『한국민속학논고』(임동권, 집문당, 1971)
『한국복식사』(석주선, 보진재, 1971)
『증보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0)
『조선복식고』(이여성, 백양당, 1946)
『고사통』(최남선, 삼중당, 1943)
『韓國の古刺繡』(許東華, 1983)
『日本の刺繡』(今井むつ子, 每日新聞社, 1976)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