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적으로 포(布)로 냈기 때문에 보포라고 부른다. 국역의 형태는 군역·향역·공장(工匠) 등 다양했지만, 대부분이 국방의무인 군역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보포하면 사실상 군포를 가리켰다.
조선 초기에 정군(正軍)이 병역에 동원되는 경비를 봉족(奉足)이라는 조정(助丁)에게 부담하도록 해서 1404년(태종 4)부터는 호(戶) 단위의 경비 부담이 정해졌다. 이것이 1458년(세조 4)에는 장정의 숫자를 단위로 고쳐졌고, 1464년 봉족으로 고쳐 2정(丁)을 1보(保)로 하는 보법(保法)이 되었다.
보법에 따라 보인(保人)은 정규군의 경비를 보조했는데, 방군수포(放軍收布)의 일반화와 군역의 군포화라는 추세에 따라 보인의 부담도 포(布)로써 수납하게 하면서 이를 보포라 하였다.
1594년(선조 27) 훈련도감의 설치를 시작으로 용병제(傭兵制)가 실시되면서 재정의 유지는 주로 보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각종 명목의 역보(役保)를 증설해서 보포를 징수하였다.
1751년(영조 27) 균역법이 시행되면서부터 보포는 반으로 줄여서 한 사람이 매년 포 1필, 또는 쌀 6말로 하되 전납(錢納)인 경우는 2냥이고 조나 콩으로도 낼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역종에 따라 포보(砲保)·경역보(京役保)·내취보(內吹保)·어영보(御營保)·악생보(樂生保) 등으로 불렸으며, 이는 역(役)의 세납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871년(고종 8)에 이르러 비로소 보가 폐지되면서 일반 민호(民戶)에 호세(戶稅)로서 일률화되었다.
조선 왕조는 양천제적(良賤制的) 신분 원리를 바탕으로 사회 정치 체제를 운영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良人) 장정에게는 기본적으로 국방 의무로서 군역을 부과하였다.
군역의 대상에는 원칙적으로 왕족을 포함한 사농공상의 어느 계층도 예외일 수 없었지만, 그것이 신분 직역제적 원리와 결합되면서 양반 지배층은 관직에 나아감으로써, 역관·의관·서리 등 특수 실무에 종사하는 경우에는 그 직역으로써 양역인 동시에 군역을 대신하였다.
관직에 나아가는 경우에는 국가에서 일정한 과전과 녹봉을 지불해 경제적 기반을 보장했지만, 대다수의 일반 양민이 종사하는 군역의 경우 그 재정 수요가 만만치 않았던 만큼 급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비복무자로 보를 설정해 복무 기간의 생계 및 영농을 보장하였다.
보인의 설정 단위는 역종에 따라 달랐지만, 군역의 경우 대체로 2정1보(2丁1保)의 원칙을 적용했으며, 보인의 부담은 정군의 복무 기간 동안 매월 면포 1필씩이었다.
15세기 후반 이후 보법의 시행에 따른 과도한 부담으로 군인의 역졸화(役卒化) 및 양반층의 피역현상을 초래해 대역납포제(代役納布制)가 성행하면서 왕조 초기의 징번병제가 점차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정군과 보인의 구분도 희미해졌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각종 군영의 증설과 더불어 군보의 임의적 설치로 군역은 점차 군포의 납부로써 의무 수행을 대신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양반층이 각종 신분적 특권을 통해 군적에서 빠져나감으로써 군역은 사실상 일반 양민의 물납세의 하나로 변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