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석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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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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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백제의 왕궁에서 사용된 석련지 관련 석조.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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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백제의 왕궁에서 사용된 석련지 관련 석조. 보물.
내용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1.57m, 지름 1.42m. 돌로 만든 물그릇으로, 현재는 박물관 안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박물관 건물 동쪽의 우물자리 아래쪽으로 1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석조는 하나의 돌에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 등을 모두 만든 둥근 받침돌 위에 놓여 있다. 아래받침돌과 간주(竿柱)처럼 생긴 가운데받침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윗받침돌 역시 옆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다만 윗받침돌의 윗면에는 석조의 몸통을 받치기 위해서 일반적인 모습의 둥근 받침대가 새겨져 있다.

몸통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여느 석조처럼 길고 네모난 전형적인 모습과 달리 둥근 모습이어서, 백제시대의 기본적인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또한 현재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석조로 알려져 있는 공주 중동 석조(보물, 1963년 지정)나 공주 반죽동 석조(보물, 1963년 지정)와도 달리 사발 모습이어서 특이하다. 곧 맨 위의 아가리부분이 약간 오므라들면서 안쪽면과 바깥쪽면 모두 둥글고, 바닥면은 평평하면서도 모나지 않게 부드러워 보인다. 바깥쪽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줄이 세로로 소박하게 돋을새김되었는데, 몸통 전체에 나타나 있는 원만한 곡선과 잘 어울려 품위를 한층 더 높여 주고 있다. 특히 겉면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오목새겨진 불분명한 여러 줄의 글자가 있는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 있는 글자와 함께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는 안쪽면과 바깥쪽면, 그리고 받침돌에도 연꽃 무늬 장식이 전혀 없으므로, 사찰과 관련된 유물은 아닌 듯하다. 석조가 자리하였던 곳이 백제시대의 궁궐터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당시 왕궁에서 쓰였던 석련지(石蓮池)였을 것으로 보인다. 받침돌이나 몸통에 나타난 풍성하고도 우아한 곡선미는 백제 사람의 돌다듬기 수법을 잘 보여주기에, 백제미를 대표하는 석조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금석문자료』1 삼국시대(국립중앙박물관 편, 국립중앙박물관, 2010)
『한국불교미술』(진홍섭, 문예출판, 1998)
『문화재대관』6 보물 4(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국보』7 석조(정영호 편, 예경산업사, 1983)
「한국 석조에 관한 일고」(옥선희,『동국사상』13, 동국대학교, 1981)
집필자
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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