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1.57m, 지름 1.42m. 현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원래는 박물관 건물 동쪽의 우물자리 아래쪽으로 1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기왕에 추정하기로는 왕궁에서 쓰였던 석련지(石蓮池) 관련 유물로 보아 왔으나, 실상은 석가모니 열반 이후의 세계에 있어서 여래의 정법을 상징하는 이른바 '깨어진 불발(佛鉢)'을 표현한 조형물이라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졌다. 『연화면경(蓮華面經)』에 교리적 근거를 두고 있는 바로서, 인도의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성행하던 간다라의 봉발(奉鉢) 신앙과 불발(佛鉢) 조형이 백제에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불교 미술품이다.
석조는 하나의 돌에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 등을 모두 만든 둥근 받침돌 위에 놓여 있다. 아래받침돌과 간주(竿柱)처럼 생긴 가운데받침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윗받침돌 역시 옆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다만 윗받침돌의 윗면에는 석조의 몸통을 받치기 위해서 일반적인 모습의 둥근 받침대가 새겨져 있다.
맨 위의 아가리부분이 약간 오므라들면서 안쪽면과 바깥쪽면 모두 둥글고, 바닥면은 평평하면서도 모나지 않게 부드러워 보인다. 바깥쪽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줄이 세로로 소박하게 돋을새김되었는데, 몸통 전체에 나타나 있는 원만한 곡선과 잘 어울려 품위를 한층 더 높여 주고 있다. 특히 겉면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오목새겨진 불분명한 여러 줄의 글자가 있는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 있는 글자와 함께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는 안쪽면과 바깥쪽면, 그리고 받침돌에도 장식이 전혀 없다. 석조가 자리하였던 곳이 백제시대의 궁궐터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당시 궁중 불교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받침돌이나 몸통에 나타난 풍성하고도 우아한 곡선미는 백제 사람의 돌다듬기 수법을 잘 보여주기에, 백제미를 대표하는 석조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