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의 태조 누루하치가 만주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고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칠 계책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출병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왜병을 격퇴시키는데 협조했고,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양호(楊鎬)가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되었기에 명분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 평안병사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副元帥), 정호서(丁好恕) · 이민환(李民寏) · 이정남(李珽男) · 김응하(金應河) · 정응정(鄭應井) 등을 문무종사관(文武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포수(砲手) 3,500명, 사수(射手) 6,500명, 도합 1만 명을 거느리고 평안도 경계상에서 대기하게 하였다. 명나라는 요동경략 양호의 총지휘 아래 총 병력 10만 명을 4대(隊)로 나누었다.
즉 좌익(左翼)의 마림(馬林)이 이끄는 군은 개원(開原) 방면에서, 중앙의 두송(杜松)이 이끄는 군은 봉천(奉川) 방면에서, 우익(右翼)의 이여백(李如柏)이 이끄는 군은 청하(淸河) 방면에서, 남부(南部)의 유정(劉綎)이 이끄는 군은 관전(寬甸)으로부터 조선의 강홍립군과 연합해 진출하게 하였다.
조선의 강홍립군은 1618년(광해군 10) 10월에 창성(昌城)에 이르렀다. 이듬해 2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유정의 군과 관전 방면에서 합류해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 남로군을 제외한 3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복배에서 후금군을 협격하였다. 그러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두송의 군은 사르후[薩爾滸]에서 대패하고, 다음날 마림의 군도 급습을 당해 무너졌다. 이어 후금군은 북상하는 유정의 군을 노성 남쪽 부차에서 요격해 격파하였다.
이 때 참전했던 조선군에서도 선천군수(宣川郡守) 김응하, 운산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강홍립 · 김응서 등은 적진과 통해 출전이 본뜻이 아님을 알리고 투항해 부차정벌이 실패로 끝났다.
강홍립이 적에 투항한 것은 본인의 뜻이 아니었으며 광해군으로부터 “형세를 보아서 향배를 정하라.”고 한 밀지(密旨)를 받았던 까닭이라 한다. 강홍립 등은 적중에 있으면서 그 내부 사정을 본국에 알리고 또 양국의 화의(和議)를 성립시키려고 정부에 알선한 일도 있으나 대부분의 투항한 장병들은 그 뒤 귀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