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지이(天變地異)를 관측,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곳이다. 고려시대는 태복감(太卜監)·사천대(司天臺)·사천감(司天監)·관후서(觀候署) 등의 명칭으로 바뀌어오다가 1308년(충렬왕 34) 서운관으로 개칭되었다.
당시의 관원은 정3품에 해당하는 제점(提點) 1인의 책임 아래 20인에 이르는 직원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의 서운관은 천문대로서 개성에 첨성대를 가지고 일식과 월식, 5행성의 운행, 혜성과 유성의 출현 등을 관찰하였다고 『고려사』 천문지(天文志)에 기록되어 있다.
서운관에서는 원시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고, 태양 흑점과 1264년(원종 5)과 1374년에는 2개의 보기 드문 큰 혜성을 관측하였다. 조선 건국 후 서운관의 기능은 그대로 계승되어 1395년(태조 4)권근(權近) 등이 돌에 새긴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다.
세종 때는 영의정의 책임하에 60인에 달한 관원들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장영실(蔣英實) 등으로 하여금 물시계, 천체관측용 기기인 간의(簡儀), 사계절과 일월5성의 운행을 알아볼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의 많은 측정기기들을 제작하게 하였고, 천문대로서 경복궁과 북부 광화방(北部廣化坊)의 두 곳에 각각 간의대(簡儀臺) 또는 관천대(觀天臺)를 건립하였다.
특히,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測雨器)와 하천의 깊이를 알아볼 수 있는 수표(水標)를 제작, 설치한 것은 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