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전라도병마절도사, 예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수지(綏之)
나정(懶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68년(세조 14)
사망 연도
1537년(중종 32)
본관
이천(利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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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전라도병마절도사, 예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수지(綏之), 호는 난정(懶亭). 할아버지는 부사 서호(徐顥)이고, 아버지는 서효당(徐孝堂)이다. 어머니는 김욱(金旭)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98년(연산군 4)에 생원이 되었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08년(중종 3)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이 때 이과(李顆)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된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 성종의 아들)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요청하고, 또 특명으로 간관에 임명된 이자견(李子堅)의 부적합함을 주장하였으며, 박수문(朴守紋)의 궐직(闕直: 당직 차례에 빠짐) 사실을 해명하다가 중종으로부터 부하망상(附下罔上)한다는 책문(責問)을 받자 피혐(避嫌)을 자청하여 체직되었다.

1514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복직된 후 국방의 요지인 양계의 병마사는 장수가 될 만한 6경 중에서 파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517년 전라도재상경차관(全羅道災傷敬差官)으로 나가 재해를 조사하였다. 이어 장례원판결사·형조참의를 거쳐, 1520년 대사간이 된 후 앞서 기묘사화 때 처벌을 피해 망명한 김식(金湜)의 어머니와 아내를 구류(拘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 전라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521년 예조참의·동부승지 등을 지내다 병으로 사임하였다. 1522년 다시 대사간이 되어 왕자와 공주의 혼례와 저택이 과도하게 사치하므로 이를 시정할 것과 관기확립에 힘쓸 것을 요구하였으며, 전라도관찰사로 승배하였으나 사헌부의 체임 주청으로 회령부사에 특별히 임명되고, 이듬해 진위사(陳慰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체임되었다. 1524년에는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공함(公緘: 공무에 관하여 주고 받는 문서)에 대한 답변문제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530년 대사헌을 거쳐 형조참판·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으나, 이항(李沆)의 옥사에 대하여 대사헌으로서 정언(正言)들의 비판을 받자 체직을 주청하였고, 대간의 논척을 받아 대호군으로 체직되었다가 파직되었다.

1532년 전라도관찰사로 복직되었으나 대사헌 재직시 이항을 비호하였다는 일로 체직, 논박을 받았다. 이어 동지중추부사·겸동지성균관사·형조판서·지의금부사·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36년 공조판서·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다시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품계를 뛰어넘는 직임이라는 삼공(三公)의 주청으로 체직된 뒤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이듬해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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