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21대 희종(熙宗)의 능으로 1237년(고종 24)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희종은 신종(神宗)의 장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成平王后) 임씨이다. 왕위에 오른 희종은 1211년(희종 7) 그가 즉위하는 데 공헌을 한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이후 자연도(현재 영종도)를 거쳐 1215년(고종 2)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1219년 (고종 6) 유배에서 돌아왔으나 1227년(고종 14) 복위 음모설에 휩싸여 최우(崔瑀)에 의해 강화로 쫒겨났다가 교동에 유배되었다. 1237년(고종 24) 8월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한 뒤 10월 석릉에 안장되었다.
2000년 석릉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봉분 주변에서 석물(石物)이 발견되었고, 2001년부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고려 왕릉 발굴이다.
강화 석릉은 지하식 석실과 곡장(曲墻) 등 고려시대 능제(陵制)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석실 상부의 8각 호석은 강화석릉과 강화 가릉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구조이다. 곡장과 석단 등은 1970년대 정비 과정에서 변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석실 내부는 이미 도굴된 상태였으나 청자 접시, 대접, 잔, 잔탁, 항아리 등 자기 조각과 관정, 금동제 장식판, 금박 편, 구슬, 동전, 자물쇠 등 금속 유물이 수습되었다. 출토된 청자 가운데 청자양각국화당초문대접은 강진 사당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파악되며, 이로부터 강도(江都) 시기 자기의 생산과 수급 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
강화 진강산(441.3m) 동쪽 능선의 남사면에 자리한다. 현재 능역은 발굴 조사 이후 복원된 것이다. 발굴 이전 강화 석릉의 능역은 남북 31m, 동서 20.5m의 규모였으며, 5단의 석축단(石築壇)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최상단에는 지름 약 4m의 봉분이 있었고 주위에 ‘∩’형태로 곡장이 둘러져 있었다. 곡장 서측 전면에는 석인상(石人像) 1기가 세워져 있었다. 2단에는 표지석과 석인상 1기가 배치되어 있었고, 3~5단에는 별다른 석물이 없었다. 3단 능역에서는 다량의 기와 조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구역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 능역의 최상단에는 석실이 위치하고 3단에는 정자각(丁字閣)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석실은 지하식이며 그 규모는 길이 3.3m, 너비 2.2m, 높이 2.3m에 달하였다. 동, 서, 북쪽의 벽은 깬돌을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7단을 쌓아 올렸다. 동, 서쪽의 벽 입구 최상단과 최하단에는 방형(方形)의 홈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인 남벽에는 문지방돌과 문의 기둥돌[門柱石]을 설치하였고, 바깥에 대형 판석 1매를 세워 막았다. 천정은 3매의 판석을 덮어 편평하게 조성하였다.
석실 바닥 가운데에 막대형 석재를 조립하여 관대를 설치하였다. 천정과 벽면에는 회를 발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 상부에는 장댓돌을 이어 지름 2.7m의 8각 호석을 설치하고 봉분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호석 외곽에는 난간석이 확인되어 난간을 둘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발굴 이전 봉분 주변에 설치되어 있던 곡장 안쪽으로 조성 당시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본래의 곡장 석렬이 확인되었다. 팔각 호석 바깥과 곡장 사이에는 부정형 판석이 넓게 깔려 있었다.
석인상 2기는 사각 기둥 형태의 몸체에 복두(幞頭)를 쓰고 홀(笏)을 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곡장 앞에 있는 문인석(文人石)은 머리와 몸체가 분리되어 있는데 동일 개체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 석릉이 자리한 능선과 동쪽, 서남쪽 능선에는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릉주변고분군(118기 분묘)이 자리한다.
강화 천도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다. 고려시대 전형적인 능제적 특징과 함께 8각 호석과 같은 개별적인 요소를 함께 보여 준다. 고려 왕실의 능제를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자, 몽골과의 전쟁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