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성원달(成元達)이고, 자(字)는 겸선(兼善), 호는 역암(易菴)이다. 아버지는 지임주사(知林州事)를 지낸 성언신(成彦臣)이다. 그의 딸은 염흥방(廉興邦)과 혼인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김광재(金光載)가 주관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346년(충목왕 2) 예문검열(藝文檢閱)로서 연복사 종(演福寺鍾) 명문(銘文)의 글씨를 쓴 것이 확인된다.
1352년(공민왕 1) 대호군(大護軍)이었을 때 정방(政房)에서 사사로이 벼슬 40여 건을 수여하였다는 죄명으로 하옥되었다가 얼마 뒤 복직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紅巾賊)의 2차 침입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에는 공민왕이 흥왕사(興旺寺)에 머물 때 일어났던 김용(金鏞)의 난 때 국왕을 모시고 피난하였다. 이 두 공로를 인정받아 모두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교주도병마사(交州道兵馬使)가 되었을 때 여진(女眞)의 삼선(三善)·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 : 현, 함경남도 홍원군)과 삼살(三撒 : 현, 함경남도 북청군)에 침입하였으므로, 정예병 500인을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그 뒤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임명되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글씨에 뛰어나 개성의 남대문종명(南大門鐘銘)과 연복사종명(演福寺鐘銘)을 썼다. 또한 1377년(우왕 3)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의 서문을 지었다. 이색(李穡)은 그의 문장을 두고 “필력은 굳세고 곧아서 빛이 쏘는 듯하다.”라고 평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