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성원달(成元達). 자는 겸선(兼善). 호는 역암(易菴). 아버지는 지임주사(知林州事)를 지낸 성언신(成彦臣)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문과에도 합격한 것으로 여겨지며, 검열(檢閱)을 거쳐, 1352년(공민왕 1)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대호군으로 정방(政房)에서 사사로이 벼슬 40여 건을 수여하였다는 죄명으로 하옥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복직되었으며,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다음 해 왕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 그 공으로 추충협익공신(推忠協翊功臣)이 되었으며, 이 해에 김용(金鏞)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등공신에 녹적(錄籍)되었다.
1364년 교주도병마사(交州道兵馬使)가 되었을 때 여진(女眞)의 삼선(三善)·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 지금의 洪原), 삼철(三撤: 지금의 北靑)에 침입하므로 정병(精兵) 500인을 거느리고 나아가 막았다. 그 뒤 삼중대광 예문관 대제학(三重大匡 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개성의 남대문종명(南大門鐘銘)과 연복사종명(演福寺鐘銘)은 뛰어난 필치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