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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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교주도병마사, 삼중대광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겸선(兼善)
역암(易菴)
시호
문효(文孝)
초명
성원달(成元達)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80년(우왕 6)
본관
창녕(昌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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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에, 교주도병마사, 삼중대광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성원달(成元達). 자는 겸선(兼善). 호는 역암(易菴). 아버지는 지임주사(知林州事)를 지낸 성언신(成彦臣)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41년(충혜왕 복위 2)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문과에도 합격한 것으로 여겨지며, 검열(檢閱)을 거쳐, 1352년(공민왕 1)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대호군으로 정방(政房)에서 사사로이 벼슬 40여 건을 수여하였다는 죄명으로 하옥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복직되었으며,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다음 해 왕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 그 공으로 추충협익공신(推忠協翊功臣)이 되었으며, 이 해에 김용(金鏞)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등공신에 녹적(錄籍)되었다.

1364년 교주도병마사(交州道兵馬使)가 되었을 때 여진(女眞)의 삼선(三善)·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 지금의 洪原), 삼철(三撤: 지금의 北靑)에 침입하므로 정병(精兵) 500인을 거느리고 나아가 막았다. 그 뒤 삼중대광 예문관 대제학(三重大匡 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개성의 남대문종명(南大門鐘銘)과 연복사종명(演福寺鐘銘)은 뛰어난 필치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성씨문헌지(成氏文獻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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