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화(子和), 호는 난곡(蘭谷). 아버지는 소휘정(蘇輝廷)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철(權喆)의 딸이다. 백부인 소휘식(蘇輝式)의 장자로 입양되었다.
약관의 나이에 사서삼경 및 제자백가를 섭렵하였으며, 아울러 과거공부에 힘썼다. 그러나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족숙(族叔)인 소휘면(蘇輝冕)에게 수학하여 위기(爲己)의 학문에 침잠하였다. 일찍이 송병선(宋秉璿)과 만나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자주 학문을 강론하였다.
소승규는 천성이 효순(孝順)하여 도내 유림들로부터 포천(褒薦: 포장에 천거됨)의 기림이 있어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원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지기(知己)의 벗들과 함께 명승고적을 답사하면서 우국상시(憂國傷時: 나라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시기)의 강개(慷慨)한 시를 남겼다. 이 때 남긴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난곡유고(蘭谷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