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당집』은 다섯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1911년 『창강고(滄江稿)』라 하여 14권 6책으로 중국에서 간행되었고, 두 번째는 1916년 15권 7책으로 『소호당집』이라 하여 간행되었다. 그 뒤에 1920년에 『정간소호당집(精刊韶濩堂集)』, 1922년 『합간소호당집(合刊韶濩堂集)』, 1924년 『중편소호당집(重編韶濩堂集)』이라 하여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그때마다 새로 지은 시문을 첨가하고 편차에 있어서도 약간씩 변화를 가하였다.
15권 7책. 신식 활자본. 『소호당집』 1911년판에는 유월력(兪樾力)과 왕성순(王性淳)의 서문이 있고, 1916년판에는 위의 서문들 앞에 하겸진(河謙鎭)의 서문이 있다. 1920년판에는 원서(原序)라 하여 유월력의 것을 싣고, 정간소호당집자서(精刊韶濩堂集自序)라 하여 저자 자신의 서문을 싣고 있다.
1916년 판의 표지에는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인 장건(張騫)이 쓴 ‘소호당집’이라는 글씨가 있고 김택영의 초상이 첨가되어 있다. 시집이 2책이고, 나머지 5책은 문집이다. 규장각도서에 제2판 『소호당집』 및 제3판 『정간소호당집』 등 2종이 있다.
『소호당집』은 창작연대순으로 분류하여 싣고 있다. 권1에는 1862년(철종 13)에서부터 1878년(고종 15) 사이에 지은 시 241수, 권2에는 1879년에서 1887년 사이에 지은 195수, 권3에는 1889년에서 1907년 사이에 지은 248수, 권4에는 1908년에서 1913년 사이에 지은 240수, 권5에는 1914년에서 1916년 사이에 지은 109수가 수록되어 총 1,033수의 시를 싣고 있다. 뒤에 거듭 찍어내면서 작품수도 늘어나고 있다.
『소호당집』 권6의 첫머리에는 오호부(嗚呼賦)가 실려 있고, 이어 문집이 전개되어 서(書)·계(啓)·서(序)가 실려 있다. 권7·8에는 서·기, 권9에는 발·명·찬·잠(箴), 권10에는 논·인(引)·해(解)·설·변·잡언(雜言)·소, 권11에는 제문·애사·뇌(誄)·사략(事略)·행장, 권12·13에는 묘문(墓文) 34수, 가술(家述) 11수, 전(傳) 19수, 권14에는 서사(書事)·지(志)·독(牘)·잡문·연략(年略), 권15는 부간(附刊)이라고 명시되어 여계충신일사전(麗季忠臣逸士傳) 9편, 서사(書事) 3편이 실려 있다. 『정간소호당집』과 『합간소호당집』은 편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거의 같다.
김택영이 초기에 쓴 시는 대체로 유미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한시에서의 풍류를 지키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패강별곡차정지상운(浿江別曲次鄭知常韻)」·「천마산단풍가(天磨山丹楓歌)」 등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정통 한문학을 계승하여 지키고자 한 그의 태도를 반영한다.
김택영은 중국망명 후에는 주로 우국적인 시를 많이 썼다. 망명지에서 을사보호조약의 소식을 듣고 쓴 「박감본국시월지사(迫感本國十月之事)」에서는 자주권을 빼앗긴 격분을 토로하였다. 「문안중근보국수사(聞安重根報國讐事)」에서는 안중근의 의거소식을 듣고 솟구치는 감격을 표현하였다. 그 이듬해에 망국의 소식을 듣고 쓴 「오호부」는 우국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호당집』에는 전(傳) 이 상당히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박지원(朴趾源)의 전을 통하여 연암의 문학을 추앙하였다. 강위(姜瑋)·황현(黃玹)·이준(李儁)·안중근 등 당대인물에 대한 전을 지어 역사기록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여계충신일사전」에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 절의를 지킨 인물들의 전을 남기고 있다. 김택영은 개성출신이었으므로 개성출신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을 저술하여 차천로(車天輅)·임창택(林昌澤)·황진이(黃眞伊)와 같은 인물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소호당집』 잡언의 대부분은 한문학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것으로 한시에 대한 평을 위주로 서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