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참의, 공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택지(澤之)
사우당(四友堂)
시호
효정(孝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7년(선조 30)
사망 연도
1659년(효종 10)
본관
은진(恩津: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주요 관직
형조참의|공조참의|예조참의
관련 사건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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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참의, 공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택지(澤之), 호는 사우당(四友堂). 동지중추부사 송세훈(宋世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송화수(宋樺壽)이고, 아버지는 송희명(宋希命)이며, 어머니는 민수경(閔守慶)의 딸이다. 재당숙인 진사 송몽인(宋夢寅)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준길(宋浚吉)과 깊이 교유하였다. 1619년(광해군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호소사(號召使) 김장생의 막료로 있다가 천거로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사간원정언·함길도도사를 지내고,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는 데 반대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문천군수(文川郡守) 등을 거쳐, 다시 사헌부장령·종묘서령(宗廟署令)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원손을 탈출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그 뒤 병조참지를 거쳐, 형조참의·공조참의·승지·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의 정절서원에 제향되고, 송시열(宋時烈)이 묘지문(墓誌文)을 지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저서로는 『사우당집(四友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송자대전(宋子大全)』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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