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신(士信), 호는 송담(松潭). 김해 출신. 할아버지는 절제사 송경(宋經)이고, 아버지는 절제사 송창(宋昌)이다. 어머니는 진사 김태석(金泰碩)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의 첫 의병장이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이 함락되고, 다음날인 15일 동래가 적에게 넘어가자, 향우인 이대형(李大亨) · 김득기(金得器) · 유식(柳湜) 등과 함께 장정 수백 인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가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도와 중군(中軍)을 맡았다.
4월 17일 북상하던 왜군의 한 부대가 김해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자, 야음을 기해 성밖의 적을 기습, 첫 교전에서 적 수백 명을 죽이고 김해와 부산 사이에 위치한 죽도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18일과 19일 전날의 참패를 설욕하려는 왜군이 대거 몰려오자 응원왔던 초계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다 먼저 달아나고, 뒤이어 부사 서예원마저 강창(江倉)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달아났다.
이에 분격한 송빈은 순수 의병만으로 영남의 곡창이며 요충지대인 이곳을 사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이끌고 들어온 장정들을 독려하여 19일 하루종일 일순도 그치지 않는 혈전을 계속하였다. 이날 밤 적은 성 주변의 보리는 물론 김해 넓은 들에 심어져 있는 보리까지 베어 성 밑에 높이 쌓고 참호를 메워 성벽을 타고 넘어왔다.
이튿날인 20일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은 와해되었다. 적이 회유책으로 투항을 권고하자 크게 꾸짖고 남은 수명의 의병을 독전해 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송빈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마친 장정이 수백 인을 헤아렸다.
4월 17일에서 20일까지의 4일 간에 걸친 김해성 싸움은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격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더욱이 관군으로 버티던 부산과 동래가 하루만에 무너진 데 반해, 비록 왜군의 한 부대였다 해도 수나 장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적과 대결하여 나흘 동안이나 버티었다는 것이 놀랍고, 특히 이후 7년 간에 걸친 싸움에서 의병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송빈의 부하인 양업손(梁業孫)이 전사자의 시체더미 속에 숨어 있다 살아 나와 당시의 참상을 전해서, 이 날의 처절한 전투가 알려졌다 이에 평정이 완전히 이루어진 1600년(선조 33) 공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1708년(숙종 34) 이순신(李舜臣)의 현손인 부사 이봉상(李鳳祥)이 「주지(州誌)」를 보다가 송빈의 공적을 발견하고 감격한 나머지 충렬사(忠烈祠)를 짓도록 건의, 송빈을 향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에 부사 정현석(鄭顯奭)과 시인 송은성(宋殷成)의 상소로 사충단(四忠壇)이 건립되어 향사되었다. 아울러 1875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순절하던 날 장대(將臺)의 벽에 적어놓은 송빈의 시는 충절단성(忠節丹誠)의 대표적인 시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