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헌숙(獻叔), 호는 반곡(盤谷). 송계성(宋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복리(宋復利)이고, 아버지는 군수 송연손(宋演孫)이다. 어머니는 김보첨(金甫添)의 딸이다. 형은 교리 송세림(宋世琳)이다.
문장에 능했으며 1524년(중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에서 수업하면서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1528년 진사로서 사행무역(使行貿易)의 폐단 등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거의 모두 채납시켰다.
153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발탁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 일당에게 배척되어 크게 진출하지 못하였다.
중종이 잠저시(潛邸時: 왕에 즉위하기 전의 시기) 아버지 송연손이 중종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어려서 중종과 같이 지낼 때가 많았다.
뒤에 왕위에 오르자 중종이 이를 잊지 않고 자주 불러 안부를 물었는데, 김안로 일당은 그들의 간사한 행동의 정상이 위로 알려질 것을 염려, 모함하고 배척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려나자 비로소 중용되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42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올랐다.
이 때 이황(李滉)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청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장령·사간을 거쳐, 1544년 국왕의 특지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일파가 득세하면서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에 책록되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해졌다. 1547년(명종 2) 외직으로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이듬해 내직으로 돌아와 공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하고, 곧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대사헌·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국가 재정을 절약하였다.
그 해에 이조판서가 되어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연결되어 불교 세력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보우(普雨)의 불법함을 여러 차례 상소하고 탄핵하며 그를 주살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조판서를 연임하던 중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면서 행정 능력도 있었는데, 특히 재정에 밝아 시폐 개혁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