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근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친 독립운동가이자 신학자이다. 1898년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를 모두 경험하면서 독립운동가, 신학교육자, 목회자로서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고, 사망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가장 유력한 학설은 1951년 7월경 평양 인근인 대동군에서 병사했다는 것이다. 보수신학이 한국교계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진보적 세계 신학을 소개하였으며, 세 번의 투옥을 경험하였다.
이후 3·1운동과 관련한 ‘강우규 의사 사건’으로 인해 수감되었다.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해 함태영도 체포되자, 그의 후임으로 남대문교회의 조사(助事)가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관련 창가 사건’으로 인해 1920년 3월 19일 ‘정치범죄 처벌령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두 번째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 1921년 9월 19일 일본 주3 문화학과에 입학하여 문학을 전공하였다. 1923년 고베(神戸)에 있는 남감리교 계통 신학교인 칸사이학원(關西學院)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1924년 4월 도쿄에 있는 미감리회 계통 신학교인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부에 편입하여 1926년 3월 졸업했다.
1926년 10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9월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친 뒤 1928년에는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로 편입, 1930년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곧바로 덴버의 아일리프신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1931년 6월 「유대사상에 근거해서 본 바울의 믿음으로 인한 구원사상」이란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에 5개월 동안 체류했는데, 이때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1월 귀국하였다. 이는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인물의 등장이었다. 같은 해 4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조사로 부임한 후 1933년 10월에 주4으로 취임했다. 1936년 4월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에서 성빈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성빈학사’를 설립, 운영했다.
1937년 10월 28일 주5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세 번째로 투옥되었고, 1938년 가을 가석방되었다. 1939년 주6 문제로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대신할 조선신학원 설립을 위한 주7를 조직하고 총무로서 활동하다가 장공 김재준 목사에게 넘기고 1940년 1월부터 김천 황금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수양동우회사건의 2심 판결에서 2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다시 수감되었다. 일 년 후 3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1년 말에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연맹 이사장, 1944년 12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 부교구장이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의 이사, 7월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총무국장이 되었다. 1940년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행적을 토대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송창근의 친일파 규정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해방 후 바울교회(현 성남교회)를 설립하고 조선신학원 교수로 취임하여 신약과 목회학을 강의하였다. 1946년 3월 조선신학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납북되었다가 1951년 7월경 대동군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