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녕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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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6사단이 1950년 9월 낙동강방어선 신녕에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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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군 제6사단이 1950년 9월 낙동강방어선 신녕에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
내용

신녕전투는 영천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영천 북방의 신녕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영천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방어 전투이다.

북한군 제2군단은 그들의 주공이 지향된 다부동∼효령 일대에서 돌파계획이 좌절되자, 의흥∼신녕 축선에 투입된 적 제8사단에 전차부대를 증원하였다. 이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하양을 목표로 대대적인 돌파 및 침투작전을 전개하며 8월 말에는 조림산-화산 선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적은 연일 계속되는 국군 및 유엔군의 지상 작전과 공중폭격으로 상당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사기마저 극도로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위천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저항선이 와해되자, 558고지∼637고지∼화산을 연하는 선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이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9월초 인접 제15사단의 영천 점령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점령한 후 영천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화산 일대에 주공을 두고 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포격을 집중해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유엔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가 진지 정면의 적에 맹폭을 가함으로써, 적의 총공격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제6사단은 즉시 방어진지 전방으로 반격해 전과확대에 돌입하였다. 적 제8사단은 이후 공세작전을 중단한 채 현 전선만을 유지하고 야간에 중대규모 수준의 소규모 전투만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군 제6사단은 예하의 3개 연대와 배속된 2개 연대를 통합하여 동서간 32㎞에 이르는 산악정면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이 제6사단의 좌측에 투입됨에 따라 제1사단은 가산∼신원간 13㎞의 정면을, 제6사단은 운산동운산동∼화산화산간 15㎞ 방어정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투지경선의 변경과 조정으로 인해 제8사단 제10연대는 제6사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원대복귀하기로 결정하였고, 제5연대와 기갑연대 또한 제7사단으로 원대 복귀한 후 육군본부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거쳐 영천을 우회 공격하려던 기도가 좌절되었고, 이는 영천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에 나섰던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 지역에서 고립된 채 각개격파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에 국군 제6사단은 대구 외곽선인 신녕지구의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키는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낙동강선방어작전』(군사편찬연구소, 2008)
『신녕-영천전투』(전사편찬위원회, 1984)
『한국전쟁』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한국전쟁사』3(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0)
집필자
양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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