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교(新佛敎)』는 1937년 3월 창간호부터 30집(1941.9.)까지는 범어사 · 통도사 · 해인사의 경남3본산회의에서 발행하였고, 31집(1941.12.)부터 종간호 67집(1944.12.)까지는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에서 발행한 잡지다. 잡지의 발행소는 모두 불교사(佛敎社)로 현재 조계사의 주소지이다.
권상로와 한용운이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발행한 『불교』지(통권 108호)의 복간을 표방한 잡지이며, 표제도 ‘불교’이다. 『불교』지와는 구분하기 위해 호수를 ‘신제(新第)○집(輯)’으로 명기하고 있다. 『신불교』의 창간호부터 19집(1939.1.)까지는 허영호(許永鎬)가 발행을 주관하였고, 1939년에 약 1년간 잠시 휴간되었다가 20집(1940.1.) 이후는 김삼도(金三道), 임석진(林錫珍) 등이 발행하였다.
초기 주요 필진은 허영호가 주축이 되고 불교청년운동을 함께 한 한용운과 강유문이었다. 한용운은 폐간된 『불교』지의 발행인으로서 속간된 『신불교』의 등장에 큰 기대를 표명하였으며, 당시 불교계 현안과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논설과 세계 불교계 동향 등을 연재하였다. 문학 작품으로 심우장의 시와 소설 『철혈미인』 등을 발표하였다. 허영호와 강유문은 일본 대정대학 동문으로, 강유문은 졸업 논문인 「신돈고」와 만해의 심우장을 방문하고 지은 시조와 여러 주제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허영호는 「교단의 미래를 전망하면서」와 「조선불교의 입교론, 본존론, 불성론」 등 교단의 지향점과 조선 불교의 정체성을 교리적으로 탐구하는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신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주석」, 「십이문론」, 「대승기신론」, 「천태사교의」 등의 경전과 논서의 우리말 번역과 「보살사상의 기원과 발달」, 「심해탈에 대해서」, 「원시불교에서 아와 무아」 등의 서구 논문을 번역해 수록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신불교』는 총본산운동을 견인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경전과 학술 논문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9집에 「황국신민의 서(誓)」와 「황실의 어번영(御繁榮)을 축함」과 같은 글들이 실리고, 이후 1년간 휴간되는 등 『신불교』의 편찬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집에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불교도」가 수록되고, 특히 대동아 전쟁 1주년 기념호로 간행된 43집(1942.12.)에 「대동아 전쟁 일지」가 수록되는 등 『신불교』는 초기에 조선 불교를 담론하는 문화 잡지로서의 생명력은 퇴색하고 대동아 공영권과 내선일체의 논리를 홍보하는 제도권 기관지로 퇴색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