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인동 출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 아버지는 수사 신명전(申命全)이다.
1692년(숙종 18)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신익황의 재주를 아껴 병조에서 과거에 응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 학덕으로 인해 1708년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717년 천거에 의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으나 왕에게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바로 돌아왔다.
신익황의 학문은 이현일(李玄逸)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1698년 5월 이현일을 광양의 배소로 찾아본 것을 시초로 여러 차례 면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전후 열 차례의 서면 질의를 통한 학문적인 논의가 있었다. 이들의 논의 내용은 유학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특히 당시 학계의 주요 관심사였던 이(理)와 기(氣),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주된 문제였다.
신익황은 이현일을 만나기 이전에는 이황(李滉)의 설보다는 이이(李珥)의 설에 기울어져 있었다. 즉, 이와 기를 분개(分開)하기보다는 혼륜(渾淪)한 입장에서 보았으며,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의 선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기의 발동(發動)에 있어서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아니라, 이이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현일과의 학문적 교섭을 통해 점차 이황·이이의 사상을 동등한 차원에서 인정하려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거기에서 더욱 철저한 논의를 거쳐 마침내 확연히 이이를 버리고 이황의 견지를 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한갓 무정의(無情意)·무조작(無造作)의 추상적인 사물(死物)이 아니라, 은연 중에 능동(能動)·능발(能發)을 간직한 것이라 하고, 이와 기를 확연히 둘로 갈라서 보았다.
이에 따라 이와 기가 한 물건이라고 보는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여 “이와 기를 구별하지 않고 한 물건이라고 하면, 마침내 욕(欲)을 이라 하고 기를 성(性)이라고 인정하게 된다.”라고 하고, “이와 기를 확연히 나누고 이가 선한 것임을 알 때 비로소 윤리가 성립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사단이 칠정의 일부분, 즉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게[中節] 된 것이라는 주기설(主氣說)을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사단은 도심이며, 칠정은 인심이라고 하였다.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이재(李栽)·정사신(丁思愼)·권중도(權重道) 등과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 저서로는 『극재집(克齋集)』·『운곡도산휘음(雲谷陶山徽音)』·『경재집해(敬齋集解)』·『이기성정통간도(理氣性情通看圖)』·『동국승경와유록(東國勝景臥遊錄)』 등이 있다.
1765년(영조 41) 아들 신염(申琰)의 공로로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 사림들이 모여 그의 위패를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