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범재(泛齋). 심광종(沈光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천군수 심의검(沈義儉)이고, 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 심대(沈岱)이다. 어머니는 전라감사 최홍한(崔弘僴)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3년(인조 1) 선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중림찰방(重林察訪)을 거쳐, 1630년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2년 형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관직에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때 이미 사사(賜死)된 인성군(仁城君)의 세 아들이 절도에 위리안치된 것을 왕이 관용을 베풀어 방면하자, 이에 찬성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반대파의 탄핵으로 보령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34년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다. 가도(椵島)에 진을 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여러 고을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자, 이들 대표와 횡포를 금하는 조약을 엄중히 체결하여 민폐 방지에 공헌하였다. 뒤에 서로(西路)의 행정이 부패한 데 혐오를 느껴, 한때 사직했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38년에는 또다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해 삼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삼남도사 겸 진정사를 택정할 때 경상도사로 뽑혔으며, 이어서 수찬·헌납(獻納)·종부시정을 지냈다.
1643년 성산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응교(應敎)·시강관(侍講官)·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사간으로서 유계(兪棨) 등과 조(祖)자의 묘호를 반대하였다. 이에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다. 이 해에 죽고 사후 신원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